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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삼봉 정도전 촌거즉사, 산중1, 산중2(三峰 鄭道傳 村居卽事, 山中1, 山中2) 관심이 가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책을 비기(秘記) 또는 비결(秘訣)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언적 기록으로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일반적인 내용이 아닌 비밀스러운 기록으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나 국가의 미래에 관하여 도참사상(圖讖思想) 및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해 행하는 내용으로 대체로 천문(天文), 역산(曆算), 음양(陰陽), 점후(占候)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유형별로는 조상이 자손의 장래를 염려하여 남겨놓은 것과 국가의 장래에 관한 것, 그리고 개인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 등이 있었다.우리나라에도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비롯하여 음양도참사상(陰陽圖讖思想)의 유입과 동시에 수많은 비기가 만들어졌는데, 옥룡자기(玉龍子記),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무학비기(無學秘記), 징비록(徵.. 더보기
아산 외암민속마을 10월 1일 국군의 날이 휴일로 지정됨에 다라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외암마을을 찾았다.나이가 들어도 흥얼거리는 ‘고향의 봄’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은 언제 불러도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노래다. 이 노래는 한국 아동 문학의 거장 동원 이원수(冬原 李元壽. 1911~1981) 선생이 작사했다. 이 노래의 배경지는 경남 창원(昌原)이다. 그가 어린 시절 봄이 오면 창원읍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질달래 명소인 천주산(天柱山)과 남산에 복숭아꽃 살구꽃이 지천인 꽃동네가 이곳이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경남 산청이다. 봄이오면 산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만개하였고 50여 가구 중 기와집 몇 채뿐이고 나머지는 초가집이 대부분 이였다. 그래서인.. 더보기
이백 왕우군(李白 王右君) 이태백이 지은 왕우군(왕희지) 시는 왕희지 사망 후 400여 년이 지나 평소 흠모하던 왕우군에 대한 일화를 시로 남겼다.이 시는 어떤 일에 전념하는 모습과 세속적인 생활을 뛰어넘은 왕희지의 특징을 잘 표현한 시다. 왕우군(王右軍 : 진(晉)의 서성 왕희지(書聖 王羲之). 321~379)의 자는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기로 왕우군또는 우장군이라 한다. 아버지는 曠(광)으로 東晉(동진)의 좋은 가문이라 영달했으며, 왕도(王導), 왕돈(王敦), 왕빈(王彬) 등과 종형제 사이이고 아들 헌지(獻之, 자 자유(子猷))도 글씨를 잘 써서 ‘이왕지서(二王之書)’라고 했다. 산음(山陰)에 난정(蘭亭)을 짓고 문인들과 교유했으며, 산음의 도사(道士)가 키우는 거위를 좋아하여 도경(道經)을 베껴 주고 그 거.. 더보기
장연우 한송정곡(張延祐 寒松亭曲)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청렴 결백한 관리를 줄여서 청백리(淸白吏)라고 한다. 공직자나 단체를 대표하는 자는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관리로서 청백리의 호칭을 받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로 간주되었으며, 오죽하면 1대가 청백리 되는 게 3대가 영의정 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의정부(議政府) 당상관(堂上官) 및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수장(首將) 등 2품 이상의 관리들이 해당 인물을 천거한 뒤 임금의 결재를 통해 의정부에서 결정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는 이러한 공직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장관에 추천되었다고 하나 청문회 때 지난날의 과오를 낱낱이 들추어내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거나 물망에 오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세상이 .. 더보기
영재 이건창 초하즉사, 홍류동희제(寧齋 李建昌 初夏卽事, 紅流洞戱題) 올해 추석(秋夕)은 여름보다도 더 더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날씨다. 9월 중순이 지났음에도 전국이 열대야로 잠을 설친 하석(夏夕)이 되었다.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폭우와 폭염, 산불 등 기상이변에 따른 피해가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 건조한 날씨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산불의 빈도와 규모가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은 기후 위기로 인한 문제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지구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인간의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통제를 상실한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 무차별 댐 건설, 지하수 난개발 등으로 300년을 걸쳐 변화를 가져올 지구 온난화가 불과 30년으로 단축됨에 따라 지.. 더보기
영재 이건창 전가추석(寧齋 李建昌 田家秋夕) 두 번째 부분 어제 소개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의 전가추석(田家秋夕)의 첫 번째를 이어서 두 번째 부분이다. 첫 번째의 분위기와 상반되게 펼쳐지는 농촌의 참혹한 실상을 한 과부를 등장시켜 애절하게 읊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에 한 농민이 겪어야 할 가렴주구(苛斂誅求 : 세금(稅金)을 가혹(苛酷)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無理)하게 재물(財物)을 빼앗음)의 처참함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그 시절의 단상(斷想)을 그려보며 현재의 풍족함 속에 소외된 이웃이 없는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연이어 두 번째 구절을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전가추석(田家秋夕 : 농가에서 맞이하는 추석) 2. 흉년이 어느 농부에게 끼치는 참상南里釀白酒(남리양백주) 남쪽 마을에는 막걸리를.. 더보기
영재 이건창 전가추석(寧齋 李建昌 田家秋夕) 첫 부분 다음 주면 민족명절 추석이다. 추석(秋夕) 또는 한가위는 음력 8월 15일에 치르는 행사로 설날과 더불어 한국의 주요 연휴이자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추석은 농경사회였던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 최대 명절이며, 가배일(嘉俳日), 한가위, 팔월 대보름 등으로도 부른다. 지금은 명절 풍습도 많이 변하여 소싯적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추석관련 함께 살펴볼 한시는 구한말 문인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의 전가추석(田家秋夕)이다. 이 시는 그가 26세 때인 1877년에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 때에 목도(目睹)한 추석을 맞은 농가의 모습을 두 부분(넉넉함과 비참함)으로 표현하였다. 첫 부분은 '지난해'의 참혹한 흉년을 겪고도 살아남.. 더보기
백거이 비파행(白居易 琵琶行)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든 뜻하지 않았든 타인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을 인연이라 말한다.연고(緣故) 또는 인연(因緣)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또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을 뜻하며, 불교의 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기도 하며, 인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은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이다. 비슷한 말로 유연(有緣)이 있다. 인연의 결과에 따라 선연(善緣), 악연(惡緣)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선업(善業)을 쌓아간다면 그 결과는 선연으로 귀결될 것이다. 1200여 년 전 백거이와 비파를 구슬프게 연주하는 여인의 애절함을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비파행(琵琶行)을 지었으리라. 그 여인과 백거이와의 만남은 이 시를 탄생하게 된 깊은 연(緣)의 결과일 것이다.  당시 노년기 들어선.. 더보기
백거이 신추희량(白居易 新秋喜凉) 나의 첫 직장은 법무부 소속으로 지방에 발령받아 6개월의 시보(試補) 기간 동안 문화의 갈증을 참지 못하고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법무훈(法務訓)이 소신(所信), 겸허(謙虛), 순리(順理)였다. 워낙 강력하게 뇌리에 남아있기에 지금까지 법무훈이 내 삶의 이정표와 같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 소신은 떳떳한 내 자신을 굳게 믿는 것이요, 겸허는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태도요, 순리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삶이란 바르게 자기의 길을 간다고 하나 여지없이 난관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풀지 못하는 난관을 헤쳐나가는 길을 법무훈에서 찾곤 한다. 또한 길을 못 찾는다 할지라도 시간이라는 순리에 기탁하기 마련이다.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난관은 시간이 풀어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간은 .. 더보기
편지로 주고받은 한시(퇴계와 율곡)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다. 500여 년 전 부산에서 한양까지 하루 12Km를 걷는다고 가상할 때 대략 40일이 넘게 소요된다.참다운 스승을 찾아 학문을 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있다 하나 직접 찾아 나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대 학자 간 주고받았던 격조가 흐르는 시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만나기 쉽지 않은  율곡(栗谷)이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간 것이 명종 13년(1558)이니, 그의 나이 23세였고 퇴계는 58세였다. 당시 율곡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공부에 전념했으며, 특히 성혼(成渾 :  1535 ~ 159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의 학문에 감탄하며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다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