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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편지로 주고받은 한시(퇴계와 율곡)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다.

500여 년 전 부산에서 한양까지 하루 12Km를 걷는다고 가상할 때 대략 40일이 넘게 소요된다.

참다운 스승을 찾아 학문을 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있다 하나 직접 찾아 나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대 학자 간 주고받았던 격조가 흐르는 시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만나기 쉽지 않은  율곡(栗谷)이 퇴계(退溪) 선생을 찾아간 것이 명종 13년(1558)이니, 그의 나이 23세였고 퇴계는 58세였다. 당시 율곡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공부에 전념했으며, 특히 성혼(成渾 :  1535 ~ 159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의 학문에 감탄하며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23세가 되었을 때 율곡 이이(李珥)는 안동에 가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황은 이 무렵 명종(明宗)의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양했다. 그러자 이이가 이황에게 벼슬할 것을 권하며 "어린 임금님이 즉위하시고 시사(時事 : 그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회적 사건을 처리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자 퇴계는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재주도 적어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소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서로를 흠모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황은 이이가 돌아가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 : 1524 ~ 1606)에게 편지를 보내 이이가 대성할 것이라며 "이이가 명석하여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생(後生)을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이는 집으로 돌아오자 이황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보냈다.

溪分洙泗派(계분수사파) 시냇물은 *사수에서 갈라져 나왔고

峰秀武夷山(봉수무이산) 봉우리는 높이 솟은 무이산입니다.

活計經千卷(활계경천권) 천 권의 경전으로 삶을 도모하고

生涯屋數間(생애옥수간) 사는 곳은 몇 칸의 남루한 초가집입니다.

襟懷開霽月(금회개제월) 가슴에는 구름 걷힌 달을 품고

談笑止狂瀾(담소지광란) 담소를 나누니 미친 물결이 잔잔해집니다.

小子求聞道(소자구문도) 제가 구하는 것은 도를 듣는 일

非偸半日間(비투반일간) 반나절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수(泗水)는 중국(中國)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강(江)으로 산둥성(山東省) 사수현(泗水縣) 동부(東部)의 배미산(陪(尾山)에서 시작(始作)하여 남서(南西)로 흘러 공자(孔子)의 출생지(出生地)인 곡부현(曲阜縣)을 거쳐 제령(濟寧) 부근(附近)에서 대(大) 운하(運河)와 합수된다. 수사(洙泗)는 공자가 살던 사수를 말하고, 무이산(武夷山)은 주자가 살던 곳이었다. 이황의 학문이 공자에게서 나오고 주자학의 중심에 있다는 말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시를 접한 퇴계의 제자 조목은 "참으로 훌륭한 시입니다."라고 하자 퇴계는 "시가 오히려 그 사람만 못하다." 하며 율곡을 칭찬하며 답시(答詩)를 보냈다.

 

화답율곡시(和答栗谷詩 : 율곡 이이의 시에 화답하다)  - 퇴계 이황(退溪 李滉)

病我牢關不見春(병아뇌관불견춘) 병으로 문 닫아걸어 봄 구경도 못 했는데

公來披豁醒心神(공래피활성심신) 공이 와서 훤히 뚫려 정신이 깨어났네.

始知名下無虛士(시지명하무허사) 그대 이름 따른 헛된 선비가 아님을 알겠고

堪愧年前闕敬身(감괴연전궐경신) 내 지난날 몸가짐을 삼가지 못한 게 부끄럽네.

佳穀莫容稊熟美(가곡막용제숙미) 잘 자란 벼논에 피 같은 잡초 없고

遊塵不許鏡磨新(유진불허경마신) 갈고닦은 거울에는 티가 끼지 못하는 법이라

過情詩語須刪去(과정시어수산거) 정에 지나치는 말을랑 모두 빼어 버리고

努力功夫各自親(노력공부각자친) 학문 연마에 노력해 서로서로 정진하세나.

 

여담으로 율곡의 탄생설화(誕生說話)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율곡설화(李栗谷說話)는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이(李珥)에 관한 이야기로 율곡의 탄생담(誕生談), 임진왜란을 예언한 방화정(放火亭 : 화석정(花石亭)에 불을 놓다)이야기, 퇴계와 대좌한 이야기 등이 전하는데 그중 탄생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청룡 · 황룡이 얼크러져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대길할 태몽이라고 여겨 강릉으로 부인을 만나러 내려오던 중이었다. 대관령 마루에 있는 주막에서 주막집 여자가 율곡 아버지의 기상을 보고 유혹하였으나, 율곡의 아버지는 꿈꾼 것을 생각하고 거절한 뒤 부인 신사임당에게 와서 율곡을 잉태하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율곡의 아버지는 대관령 주막에 들러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그 여자는 이미 큰 인물을 낳을 시기를 놓쳤다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주막집 여인은 어떤 사연이 있어 지나가는 길손의 씨를 잉태하고자 했을까? 아득한 과거 정비석(鄭飛石)님의 한국야담사화전집을 읽은 기억력을 되살려 보면 그 여인이 몇 해전 추운 겨울 눈 속을 헤치며 겨우 목숨만 유지한 체 찾아온 노승(老僧)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회복시켰는데 그 노승이 보답으로 여인의 관상을 보며 앞으로 몇 년 모월 모일에 지나가는 길손의 씨를 받으면 훗날 동방의 대 성현을 잉태할 것이라 알려준 후 주막집을 떠났다고 한다. 주모는 노승이 알려준 그날  이원수는 주막집에 도착하여 허기도 달랠 겸 잠시 쉬어 가려하였으나 곱게 차려입은 주모가 원앙금침으로 수놓은 방으로 안내하여 주안상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마침 술이 떨어져 주모가 나가려 문을 여는 순간 환히 뜬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를 본 이원수는 마치 아내 신사임당의 얼굴과 함께 집으로 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느껴 문을 박차고 집으로 달려가 그날 밤 율곡을 잉태하였다는 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