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이백 왕우군(李白 王右君)

이태백이 지은 왕우군(왕희지) 시는 왕희지 사망 후 400여 년이 지나 평소 흠모하던 왕우군에 대한 일화를 시로 남겼다.

이 시는 어떤 일에 전념하는 모습과 세속적인 생활을 뛰어넘은 왕희지의 특징을 잘 표현한 시다.

왕우군(王右軍 : 진(晉)의 서성 왕희지(書聖 王羲之). 321~379)의 자는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기로 왕우군또는 우장군이라 한다. 아버지는 曠(광)으로 東晉(동진)의 좋은 가문이라 영달했으며, 왕도(王導), 왕돈(王敦), 왕빈(王彬) 등과 종형제 사이이고 아들 헌지(獻之, 자 자유(子猷))도 글씨를 잘 써서 ‘이왕지서(二王之書)’라고 했다.

산음(山陰)에 난정(蘭亭)을 짓고 문인들과 교유했으며, 산음의 도사(道士)가 키우는 거위를 좋아하여 도경(道經)을 베껴 주고 그 거위를 가져온 일도 있고, 회계(會稽 : 지금의 절강성 소흥)의 어느 노파가 기르는 거위가 잘 운다는 말을 듣고 거위를 보러 가니 노파는 왕희지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그 거위를 잡아 대접하려 했으므로 왕희지는 이를 듣고 여러 날 탄식할 정도로 거위를 애지중지했으며 거위가 놀 수 있는 연못을 만들어 비석을 세웠는데 이를 아지비(鵝池碑)라고 한다.

 

서성 왕희지에 대하여는 앞서 난정서(蘭亭序)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 왕희지 난정서(王羲之 蘭亭序) (tistory.com)

 

시 속의 주인공 왕희지는 어구(語句)에서 소개한 대로 거위를 좋아한 일화(逸話)가 전하는데,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지은, 양(梁)에서 수(隋)까지 네 나라에 벼슬을 한 안지추(顔之推 531~601)가 평하기를 “풍류재사(風流才士 : 풍류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요 소쇄명인(瀟洒名人 : 순수하며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 했다고 하며, ‘난정집 서문(蘭亭集序文)’을 짓고 쓸 정도로 문장에도 뛰어났다. 수련(首聯 1~2구)에서 그의 풍모를 말하고 함련(頷聯 3~4구)에서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함을 산음의 도사는 기뻐했다고 했다. 경련(頸聯 5~6구)에서는 거위를 달라는 왕희지의 요청에 “그대가 글씨의 대가이니 도경을 베껴 주면 거위를 주겠노라.”는 도사의 요구를 들어 비단에 신들린 듯 도경을 베껴 쓰는 모습을 기리었으며, 도경(道經 : 도가(道家)의 경문으로 위 부인(魏夫人)이 전한 황제내경경(黃帝內景經), 왕희지가 베껴서 거위와 바꾸었다는 황제 외경경(黃帝外景經), 황정 둔갑 연신경(黃庭遁甲緣身經), 황정 옥축경(黃庭玉軸經)의 네 가지가 있으며, 황정경(黃庭經)이라고 한다.)을 다 써서 주고는 간다는 말도 없이 거위를 광주리에 담아 돌아왔다고 미련(尾聯)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백이 바라보는 왕우군은 어떤 일에 전념하는 모습과 세속적인 생활을 뛰어넘은 왕희지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기에 자서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왕우군(王右君 : 왕희지)    - 이백(李白)

右軍本淸眞(우군본청진) 왕우군은 본디 조촐하고 거짓 없으니

瀟洒在風塵(소쇄재풍진) 세상에 섞여 살면서도 세속을 벗어났었네.

山陰遇羽客(산음우우객)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愛此好鵝賓(애차호아빈) 도사는 거위를 좋아하는 왕희지를 좋아했네.

掃素寫道經(소소사도경) 도경을 베껴 주면 거위를 주겠다는 말에 흰 비단을 쓸 듯 경을 써 가니

筆精妙入神(필정묘입신) 그 필적이 묘하기 신의 경지에 든 듯하더라.

書罷籠鵝去(서파농아거) 다 쓰고 나서는 거위를 바구니에 담아

何曾別主人(하증별주인) 주인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