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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영재 이건창 전가추석(寧齋 李建昌 田家秋夕) 첫 부분

다음 주면 민족명절 추석이다. 추석(秋夕) 또는 한가위는 음력 8월 15일에 치르는 행사로 설날과 더불어 한국의 주요 연휴이자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추석은 농경사회였던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 최대 명절이며, 가배일(嘉俳日), 한가위, 팔월 대보름 등으로도 부른다.
지금은 명절 풍습도 많이 변하여 소싯적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추석관련 함께 살펴볼 한시는 구한말 문인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의 전가추석(田家秋夕)이다. 이 시는 그가 26세 때인 1877년에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 때에 목도(目睹)한 추석을 맞은 농가의 모습을 두 부분(넉넉함과 비참함)으로 표현하였다.
첫 부분은 '지난해'의 참혹한 흉년을 겪고도 살아남은 농민들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풍년을 구가(謳歌)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지난해'는 1876년인데, '병자년 기근'이라 하여 조선 후기에 가장 혹심했던 흉년을 기록했던 해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시적 분위기가 어둡고 슬퍼진다. 유복자(遺腹子)를 안은 과부의 사연이 진술(陳述)된다. 그의 남편은 굶주려 죽을 지경인데도 끝까지 종자로 쓸 곡식을 먹지 않고 간수하여 봄에 논에 파종하고 곡식을 가꾸다가 그만 기운이 다해 목숨을 잃고 만다. 굶주려 죽은 남편의 시신은 땅속에서 썩어 가고 남편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심은 곡식을 무럭무럭 자라나는 역설적인 장면은 당대의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상황을 절절하게 보여 준다.
 
모두가 풍성하게 맞이해야 할 명절이지만 이면에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야 할 이웃을 생각하며 더불어 함께 누려야 할 행복한 중추가절을 기원해 본다. 147년 전 영재선생께서 겪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열대야가 흐르는 밤에 전가추석의 첫 부분을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전가추석(田家秋夕 : 농가에서 맞이하는 추석)
 
1. 넉넉한 추석을 맞이하는 농가의 모습(지난해 혹심했던 흉년을 경계하며)

京師富貴地(경사부귀지) 서울이라 부귀한 곳에는
四時多佳節(사시다가절) 철 따라 명절도 많다지만은
鄕里貧賤人(향리빈천인) 시골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는
莫如仲秋日(막여중추일) 추석만한 명절이 없다.
 
秋日有晴暉(추일유청휘) 가을 낮에는 햇빛도 많고
秋宵有明月(추소유명월) 가을 밤에는 밝은 달이 있어
風景固自佳(풍경고자가)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非爲我輩設(비위아배설)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但見四野中(단견사야중) 다만 보이는 것은 사방 들판에
嘉穀正垂實(가곡정수실) 좋은 곡식 이삭을 드리우니
早禾已登場(조화이등장) 이른 벼 벌써 타작을 하고
豆菽亦採擷(두숙역채힐) 콩도 역시 손으로 따며

中庭剝於葵(중정박어규) 안뜰에서는 해바라기 씨를 까고
後園摘苞栗(후원적포율) 뒤뜰에서는 밤톨도 깐다.
團團土火爐(단단토화로) 단단한 흙 화로는
吹扇紅榾柮(취선홍골돌) 부채질에 등이 붉게 타고
 
煮飯作羹湯(자반작갱탕) 밥하고 국 끓여서
大家劇啗啜(대가극담철) 온 식구가 포식을 한다.
一飽便意氣(일포편의기) 한번 포식에 기분이 좋아
散漫雜言說(산만잡언설) 시끄럽게 여러 말이 오가는데
 
去年大凶年(거년대흉년) 지난해 큰 흉년
幾乎死不活(기호사불활) 죽고 못 살 것 같더니만
今年大豊年(금년대풍년) 금년은 대풍이라
天意固不殺(천의고불살) 하늘이 죽일 뜻이 없는 것이구나

恨不腹如鼓(한불복여고) 배가 북처럼 크지 않아 한스럽고
恨不口雙裂(한불구쌍렬) 입이 찢어지지 않아 한스러워
日食十日量(일식십일량) 하루에 열흘 양식을 먹어 치웠다.
快意償饕餐(쾌의상도찬) 기분 좋은 마음 음식도 탐스럽다.
 
父老在上座(부로재상좌) 윗자리 앉은 어르신께서
呼語勿亂聒(호어물란괄) 조용히 하라 이르시고는
民生實艱難(민생실간난) 민생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니
物理忌盈溢(물리기영일) 이치는 가득 차 넘치는 것을 꺼려한다.
 
莫已今醉飽(막이금취포) 지금 배부르고 취하였다 해서
或忘舊飢渴(혹망구기갈) 지난날의 굶주림을 잊지 말아라.
吾老頗經事(오로파경사) 우리 늙은이 많은 일 겪었는데
過食則生疾(과식즉생질) 과식하면 당연히 병이 난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은 개항기 때, 한성부소윤(漢城府少尹), 안핵사(按覈使 : 지방에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처리하기 위한 파견 임시관직), 승지(承旨)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兒名)은 이송열(李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이상학(李象學)이다.
 
할아버지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 ·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 · 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대처하는 성격이어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정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간(忠諫)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는 벼슬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 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弘文館) 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황각(黃珏) · 장가양(張家驤) · 서보(徐郙)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춰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간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 이겨, 1880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때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이건창의 선정비(善政碑)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어버이상을 당해 6년간 상례를 마치고 1890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예측한 이건창은 시급히 국법을 마련해 국민들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그때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부 소윤의 상소내용을 알고, 공한으로 “청국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이건창은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해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건창은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써 다스려 가중처벌을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였고 청국인 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였다.
 
1891년 승지가 되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亂民)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무를 집행하는 이건창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개혁 이후로는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 · 특진관(特進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6년 해주부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 번째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후에 풀려났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문필은 송대(宋代)의 대가인 증공(曾鞏) · 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이며 대시인인 김택영(金泳澤)이 우리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대(全代)를 통해 몇 안 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