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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송담 송남수 산재사시(松潭 宋柟壽 山齋四時) 앞서 소개한 윤증(尹拯)의 명재고택(明齋故宅)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충청을 대표하는 명족(名族)으로 연산(連山)의 광산김씨(光山金氏), 노성(魯城)의 파평윤씨(坡平尹氏), 회덕(懷德)의 은진송씨(恩津宋氏)를 언급한 바 있는데 우암은 자신을 명족으로 말하기보다 가까운 인척인 송담 송남수(松潭 宋柟壽)를 염두에 두고 지칭했을 수 있다. 그 당시 송담은 90세, 우암은 82세를 살았으니 천명(天命)를 누렸던 장수 집안이다. 우암이 소싯적 쌍청당(雙淸堂)에 놀러 다니며 마치 신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송담을 대하면서 그의 학문과 발자취를 담고자 했을 것이며, 자부심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은진송씨(恩津宋氏)를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보다 70년 앞서 태어나 고매(高邁)한 인품과 후덕(厚德)한 성품으로 .. 더보기
윤증 명재고택(尹拯 明齋故宅), 시 한 수 조선 중 후기 충청을 대표하는 명족 가문으로 송시열은 연산(連山)의 김씨, 노성(魯城)의 윤씨, 회덕(懷德)의 송씨로 거론했다고 전한다. 사계 김장생(1548 ~ 1631), 신독재 김집(1574 ~ 1656)으로 대표되는 연산의 광산김씨(光山金氏), 우암 송시열(1607 ~ 1689), 동춘당 송준길(1606 ~ 1672)을 대표하는 은진송씨(恩津宋氏)는 회덕(懷德)을 근거지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으며, 이에 윤증(1629 ~ 1714)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일명 노성윤씨)를 대표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 : 솥의 발처럼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의 삼각축을 이루고있다. 지난겨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한 명재고택을 다녀왔다. 비록 날씨는 차가웠지만 명재 윤증 선생의 고택을 찾아 선생.. 더보기
두보 강반독보심화 칠절구(杜甫 江畔獨步尋花 七絕句)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두보(杜甫. 712 ~ 770)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 시대(盛唐時代) 시인이다.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소개하고자 하는 두보의 시 강반독보심화칠절구(江畔獨步尋花七絕句)는 전당시(全唐詩) 227권에 실려 있으며 당(唐) 숙종(肅宗) 상원(上元) 2년(761년) 봄에 두보가 성도(成都) 완화계(浣花溪)에 모옥(茅屋)을 짓고 거처하였을 때 지은 유명한 시다. 흐드러지게 꽃 핀 봄날 강가에서 한번쯤 되뇌고 싶은 시로 7수가 실려 있는데 그중 1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강반.. 더보기
상촌 신흠 대나무(象村 申欽 竹) 중국에는 고결한 선비정신의 상징인 대나무와 관련된 죽림칠현(竹林七賢) 고사(故事)가 있다. 266년 경 위(魏) 나라에서 진(晋) 나라로 왕조가 바뀌자 그 혼란을 피하여 죽림으로 들어가 세속과 교제를 끊고 술잔을 나누며 청담(淸談)에 열중했다고 하는 완적(阮籍)·산도(山濤)·혜강(嵇康)·향수(向秀)·유령(劉伶)·원함(院咸)·왕융(王戎) 등 7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를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불렀다. 죽림(竹林)은 탁한 속계(俗界)와는 멀리 떨어진 장소로서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담론(談論), 이른바 청담(淸談)을 논의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이후 죽림은 속진(俗塵)을 싫어하는 고결한 선비가 애호하는 것으로 되었다. 조선 중기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 1.. 더보기
아계 이산해 잠부(鵝溪 李山海 蠶婦)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린 양잠(養蠶)은 소싯적 할머니께서 누에유충을 구해와 애지중지 기르시는 모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누에는 쉬지 않고 뽕잎을 먹어대며 폭풍성장을 한다. 안방까지 차지 한 누에는 끊임없이 주 먹이인 뽕잎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뽕잎 먹는 사각사각 소리가 한밤에도 들리고 특유의 냄새 또한 뇌리에 남아있다. 농가의 주 수입원이다 보니 대나무로 칸칸이 누에 집을 만들고 한여름 주변에 심은 뽕잎 가지를 낫으로 베어 쉴 새 없이 날라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고난의 길이었으리라. 이렇게 길러 비단 옷감을 짜는 여성들은 정작 비단옷을 입지 못했다. 아계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끊임없이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아낙의 눈으로 세상의 불평등과 고행을 .. 더보기
신독재 김집 죽(愼獨齋 金集 竹) 앞서 소개한 죽순 관련 한시에서 대나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군자라는 인격체로 표상되어 왔다. 대나무가 군자에 비유된 것은 대나무의 본성이 유교적 윤리도덕의 완성체인 군자와 그 관념적 가치가 일치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곧게 자란 모습에서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는 조선시대 문학자 사이에 시제(詩題)로 자주 등장하는데 신독재 선생 또한 대나무에 대한 시를 남겨 이를 살펴보고자 행서로 자서해 보았다. 김집은 앞서 신독재 김집 시 몇 수에서 소개한 바 있다. 죽(竹) 已懷剛勁節(이회강경절) 이미 굳은 절개 품었거니 寧怕雪霜來(녕파설상래) 눈서리를 두려워하랴 四時長不改(사시장불개) 사시장철 변치 않은 그 모습 無落亦無開(무락역무개) 떨어지는 것도 다시 피는 .. 더보기
울산 대왕암(蔚山 大王巖) 울산 대왕암(蔚山 大王巖)은 대표적 관광지로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빼어난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울산의 명소이기도 하다. 나 또한 몇 년만에 찾아오니 푸른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발길이 머무는 곳, 둘러보는 어디나 절경 아닌 곳이 없었다. 울산이 자랑하는 대왕암의 풍경과 울주에서 태어나 자란 반계선생이 이곳에 올라 ‘유은모군과 함께 바다를 보고 대왕암에 오르다.(與柳君殷模觀海登大王巖)’라는 시를 지를 지었다. 그가 남긴 시 2 수 중 한 수를 자서(自書)와 함께 대왕암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반계 이양오(磻溪 李養吾. 1737~1811년)는 조선 후기 유학자, 문장가로 본은 학성(鶴城),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이며, 울주군 온양읍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영민하여 의문이 .. 더보기
죽순(竹筍)관련 한시 2수, 대나무 종류 대나무는 벼과의 아과인 대나무아과(亞科, 학명: Bambusoideae)에 속하는 식물이다. 총 92개의 속과 5,000여 종이 있다. 예로부터 사군자(四君子 : 梅.蘭.菊.竹)의 하나로 절개의 상징으로 쓰인다. 대나무는 열대지역부터 추운 산악지방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서식하며, 우리나라에는 4 속 14종이 있다 동양에서 주로 약재나 요리의 재료로 이용되는 죽순(竹筍, bamboo shoot)은 대나무의 땅속줄기는 마디마다 뿌리와 싹을 갖추고 주로 3 ~ 4년째의 싹이 나온다. 온대지방에서는 초봄에, 열대지방에서는 여름에 성장을 시작한다. 성장 속도는 점차 증가해서, 지상에 얼굴을 내미는 무렵에는 하루에 몇 센티미터 정도였던 것이 10일경에는 하루에 수십 Cm에서 때로는 1m 넘게 자라 덩굴식물을 제외하고.. 더보기
운봉 성수 오도송(雲峰性粹 悟道頌) 우리나라 불교역사를 보면 근대 고승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6.25 전쟁의 격동의 시대를 겪으며 그 어려웠던 시기에 확고한 신념, 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도의 길로 접어든 많은 이들 중에 훌륭한 선사들이 나타나 현재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성수스님 또한 간절한 참구와 철저한 용맹정진으로 화두를 타파하고 오도의 경지를 이룬 선승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오도송을 자서해 보았다. 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6)선사는 근대 고승으로 법명은 성수(雲峰)이며, 법호가 운봉(雲峰)이다. 1889년 12월7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정(鄭)씨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어린 나이에 향교에 들어가 학문을 익힘에 그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13세 살에 부친을 따.. 더보기
박인량 주중야음(朴寅亮 舟中夜吟) 박인량(朴寅亮. ? ~ 1096년) 고려 초.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대천(代天). 고려 개국공신인 박수경(朴守卿)의 현손(玄孫)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일찍이 거란이 압록강 동쪽 지역에 야심을 가지고 강을 건너와서 동안(東岸)에다 보주(保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를 설치하여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환을 요청해도 듣지 않다가, 1075년(문종 29) 박인량이 지은 진정표(陳情表)가 요주(遼主)를 감동시켜 철거하게 되었다.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1080년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호부상 서유홍(柳洪)과 함께 송나라에서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갔는데, 저장(浙江)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방물(方物)을 잃은 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