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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아계 이산해 잠부(鵝溪 李山海 蠶婦)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린 양잠(養蠶)은 소싯적 할머니께서 누에유충을 구해와 애지중지 기르시는 모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누에는 쉬지 않고 뽕잎을 먹어대며 폭풍성장을 한다. 안방까지 차지 한 누에는 끊임없이 주 먹이인 뽕잎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뽕잎 먹는 사각사각 소리가 한밤에도 들리고 특유의 냄새 또한 뇌리에 남아있다. 농가의 주 수입원이다 보니 대나무로 칸칸이 누에 집을 만들고 한여름 주변에 심은 뽕잎 가지를 낫으로 베어 쉴 새 없이 날라야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고난의 길이었으리라. 이렇게 길러 비단 옷감을 짜는 여성들은 정작 비단옷을 입지 못했다. 아계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끊임없이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는 아낙의 눈으로 세상의 불평등과 고행을 잠부라는 시를 통해 알리고자 했다. 한세대 앞선 이들 또한 함께 겪은 시름과 힘들었던 일상을 잠부라는 시를 통해 느껴보고자 한다. 또한 북송시대(北宋時代) 문학가 장유의 시와 함께 묘하게 다고 오는 정서적 느낌이 같아 행서체로 자서해 보며 누에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본다.

잠부(蠶婦 : 누에 치는 아낙) - 이산해

養蠶有何利(양잠유하리) 누에를 친 들 무슨 이익 있으랴
不見身上衣(불견신상의) 비단옷 걸친 사람 보이지 않네
堪憐隣舍女(감련린사녀) 가엾어라 저 이웃집 아낙은
日日摘桑歸(일일적상귀) 날마다 뽕잎 따서 돌아오는구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장윤(李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李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7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한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부교리를 역임하고, 직제학(直提學)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이어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마친 뒤, 1570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577년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를 차례로 지내고 대사성·도승지가 되었다.
1578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윤현(尹晛) 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다음 해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領袖)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 해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임인(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策錄)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해 개성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백의(白衣)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 : 어느 한 곳을 정하여 머물도록 하는 형벌)되었다.
1595년 풀려나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하였다. 북인이 다시 분당 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홍여순(洪汝諄) 등과 대북파가 되어 영수로서 1599년 재차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1년 부원군(府院君)으로 환배(還拜: 복직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한다. 서화도 잘해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으며,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와 안강의 이언적묘비(李彦迪墓碑)를 썼다. 이이(李珥)·정철(鄭澈)과 친구였으나 당파가 생긴 뒤로는 멀어졌다. 저서로 아계집(鵝溪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잠부(蠶婦) - 장유(張兪)

昨日到城市(작일도성시) 어제 고을에 갔었는데
歸來淚滿巾(귀래누만건) 돌아올 때 손수건에 눈물 흠뻑 적셨네
遍身羅綺者(편신라기자) 온몸에 비단을 걸친 사람은
不是養蠶人(부시양잠인) 누에 치는 사람들이 아니었네

장유(張兪. ? ~ ?) 북송(‎北宋)의 문학가로 사천현(四川縣)에서 태어났으며, 생졸 년대는 미상이다. 자는 소우(少愚), 호는 백운선생(白雲先生)이다.

누에(蠶)
누에(silkworm)는 나비목 누에나방과에 속하는 누에나방의 유충으로 오래전부터 길러 왔기 때문에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묘(䖢),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蟻子), 세 번째 잠자는 누에는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노(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踊),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繭), 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

몸통은 원통형이며, 머리 ·가슴 ·배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몸은 배자 때에는 14마디이나 배자발생 도중에 제13마디가 작아져서 제14마디와 융합되어 1마디 모양이 되기 때문에 13마디가 된다. 다리는 가슴 마디에 3쌍, 배마디에 4쌍이 있으며, 제11마디 등 쪽에 미각이 있다. 6쌍의 홑눈이 있으나 시각 작용은 하지 못하며, 미각과 후각 기능은 아래 턱수염이 한다. 직사광선을 싫어하고 15∼30 lx의 밝기를 좋아한다. 몸은 젖빛을 띠며 연한 키틴질 껍질로 덮여 있어 부드러운 감촉을 준다.

알에서 부화되어 나왔을 때 누에의 크기는 약 3 mm이며, 털이 많고 검은 빛깔을 띠기 때문에 털누에 또는 개미누에[蟻蠶]라고 한다. 개미누에는 뽕잎을 먹으면서 성장하며, 4령잠을 자고 5령이 되면 급속하게 자라서 8 cm 정도가 된다. 5령 말까지의 유충 기간 일수는 품종과 환경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20일 내외이다. 5령 말이 되면 뽕 먹는 것을 멈추고 고치를 짓기 시작하는데 약 60시간에 걸쳐 2.5 g 정도의 고치를 만든다.
실은 1개의 고치에서 1,200∼1,500 m가 나온다. 고치를 지은 후 약 70시간이 지나면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되며, 그 후 12∼16일이 되면 나방이 된다. 이 나방은 알칼리성 용액으로 고치의 한쪽 끝을 뚫고 나오며, 암 나방은 약 500∼600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

현재 한국에서는 봄누에용, 가을누에용, 봄 ·가을누에 겸용으로 나누어 장려 품종을 지정하고 있다. 봄누에용으로 칠보잠 ·육농잠 ·장춘잠 ·다보잠 ·영산잠 등이 있고, 가을누에용으로는 경연잠 ·사성잠 등이 있다. 봄 ·가을누에 겸용잠으로는 백옥잠이 있다.

한국에서 누에가 전래된 것은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기자(箕子)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에 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삼한과 고려를 거치는 동안 역대 왕들이 장려 발전시켰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11년 후비친잠법(后妃親蠶法)을 제정하여 왕후로 하여금 궁중에서 누에를 치게 하였고, 세조 1년에는 종상법(種桑法)을 제정 공포하여 대호 300그루, 중호 200그루, 소호 100그루, 빈호 50그루씩을 심게 하였으며, 뽕나무를 잘못 심어 말라죽게 한 농가는 벌을 주기까지 하였다.
또한 누에를 치는 데 관계된 서적을 간행하여 양잠기술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즉, 세종 때에는 언문으로 된 양잠서(養蠶書)가 있었다고 하며, 중종(中宗) 때에는 김안국(金安國)이 《잠서언해(蠶書諺解)》를 저술하였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농상집요(蠶桑輯要)》 《잠상촬요(蠶桑撮要)》 등의 서적이 간행되었다.

《규합총서(閨閤叢書)》의 누에치기와 뽕기르기 항목에는 누에치기 좋은 날과 꺼리는 날, 누에를 내고 미역감기기 좋은 날, 누에가 꺼리는 것, 누에 미역감기는 법 따위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누에를 이용한 상처의 치료법도 기록되어 있다.
누에를 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副産物)도 적지 않다. 누에똥은 가축 사료, 발근 촉진제, 녹색 염료, 활성탄 제조 및 연필심 제조 등에 쓰이며, 제사(製絲) 과정에서 나오는 번데기는 식용과 사료, 고급 비누와 식용유의 원료로 쓰인다. 누에가 죽어서 마른 것[白殭蠶], 번데기, 두 번째 기른 누에나방[原蠶蛾], 누에똥, 누에알 낸 종이[蠶布紙], 풋고치[新綿] 등은 한방에서 약으로 쓴다. 그밖에 유전(遺傳)에 관한 실험과 생리 실험동물로도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