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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신독재 김집 죽(愼獨齋 金集 竹)

앞서 소개한 죽순 관련 한시에서 대나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군자라는 인격체로 표상되어 왔다. 대나무가 군자에 비유된 것은 대나무의 본성이 유교적 윤리도덕의 완성체인 군자와 그 관념적 가치가 일치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곧게 자란 모습에서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는 조선시대 문학자 사이에 시제(詩題)로 자주 등장하는데 신독재 선생 또한 대나무에 대한 시를 남겨 이를 살펴보고자 행서로 자서해 보았다.  김집은 앞서 신독재 김집 시 몇 수에서 소개한 바 있다. 

 

죽(竹)

已懷剛勁節(이회강경절) 이미 굳은 절개 품었거니

寧怕雪霜來(녕파설상래) 눈서리를 두려워하랴

四時長不改(사시장불개) 사시장철 변치 않은 그 모습

無落亦無開(무락역무개) 떨어지는 것도 다시 피는 것도 없도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 조선시대 이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의 영향으로 장성하여 예학(禮學)을 중시하였다. l8세 때 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과 북인이 주도하는 현실외교정책과 대동법시행 등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여 아버지(김장생)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인이 주도하는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다시 등용되어 부여 현감이 되고, 이어 임피현령·지평(持平)·집의(執義)·공조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중기에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퇴직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산당(山黨 : 조선시대 서인의 한 분파)의 영수가 되어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는 한당(漢黨 : 조선 중기에 서인 가운데 김육을 우두머리로 한 분파)의 영수 김육(金堉)과 대립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제도는 오히려 백성의 충의 발현이며 백성으로서 예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 연구에 집중하여 아버지 김장생과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그의 수제자이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文廟)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鄕祠 : 학자,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집을 세우고 제사 지내는 사당)되었다. 시호 문경(文敬)이다.

문집에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편서에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