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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남명 조식 시(南冥 曺植 詩) 몇 수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한 번쯤은 들어봤던 남명 조식 선생의 시조이다.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건중(健中) 혹은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南冥)·방장산인(方丈山人)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골(兎洞)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펼쳐놓고 자신을 독려.. 더보기
도연명 오류선생전(陶淵明 五柳先生傳)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도연명의 자전(自傳)이다. 하지만 오류선생전 에서는 스스로의 전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보고 읽으면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의 가공인물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연명의 사후 사람들은 오류선생전을 도연명의 자서전이라고 생각해 왔다. 오류선생전은 겨우 170자 정도의 짧은 문장으로 그의 삶과 이상(理想)을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버드나무와 중국문학에 대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상징성과 그의 행장을 알 수 있는 명문장으로 이해되고 있어 이를 행서로 자서해 보았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先生(선생) 선생은 不知何許人(부지하허인) 어디쯤의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亦不詳其姓字(역부상기성자) 그 성명과 자(字)도 자세하지 않다. 宅邊有五柳樹(택변.. 더보기
이이 화석정(李珥 花石亭) 화석정(花石亭) 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8세 때 경기도 파주에 있는 花石亭에 올라 지은 시이다. *東國18賢 반열에 올라 있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남긴 율곡 행장(行狀)과 문성공율곡이선생묘지명(文成公栗谷李先生墓誌銘) 에도 화석정 시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에도 천재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율곡 시 화석정을 색지에 자서해 보았다. 화석정(花石亭)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었는데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뜻이 끝이 없도다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저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게 물들었네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더보기
율곡 이이 산중미로(栗谷 李珥 山中迷路)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중종31-선조17)는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1536년(중종 31년) 강릉 북평현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며, 156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이후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병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의 선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했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이이와 이황, 기대승, 조식 등 대학자들이 16세기에 태.. 더보기
정도전 방김거사야거(鄭道傳 訪金居士野居)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무신(武臣) 및 유학자(儒學者) 겸 시인(詩人)이며, 외교관(外交官), 정치가(政治家), 유교사상가(儒敎思想家), 유학 교육자(儒學敎育者)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심기리편(心氣理篇), 감사요약(監司要約),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의론(經濟議論), 심문천답(心問天答), 팔.. 더보기
맹호연 시 2수 춘효. 초추(孟浩然 詩 2首 春曉. 初秋) 맹호연(孟浩然, 689-740) 당나라 전성기 유명 시인.. 이름이 호(浩), 자는 호연(浩然)이며,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에서 출생,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고향에서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과거에 낙방한 후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동시대의 왕유(王維)와 더불어 전원산수(田園山水)를 주제로 많은 시를 남겼기에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함께 일컬어 "왕맹(王孟)"이라고 불리운다. 세월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연못 담장 사이 봄풀이 꿈도 깨기 전에 뜰앞에는 이미 오동잎지는 가을이라는 朱熹의 싯구가 생각난다.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겠다. 입동을 며칠 앞두고 맹호연의 봄과 가을에 관한 시가 생각나 자서해 보았.. 더보기
추사 김정희 시(秋史 金正喜 詩) 몇 수 추사 김정희(金秋史 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 금석학자 · 고증학자이며 실학자이다. 충청남도 예산(禮山)출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200여 가지에 이른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48년 옥사에 연루되어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51년 친구인 영의중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또다시 유배되어 2년 만에 풀려났다. 이러한 각고의 어려움 속에서 예.. 더보기
조식 칠보시(曹植 七步詩) 칠보시는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편(文學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조식((曹植. 192~232 중국 위(魏)나라 시인. 자는 자건(子建). 조조(曺操)의 둘째 아들))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문재(文才)가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조조 사후 왕이 된 후에도 형 문제(文帝) 조비(曺丕)는 동생 조식을 미워했다. 그러던 차에 그의 약점을 핑계로 조식을 아예 제거하려고 작심했다. 그런데 어머니 변태후가 이를 알고 조비를 불러다가 잘 타일러 죽음만은 면해주게 하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어서 낮은 작위로 강등시켰다. 그런 다음 조식을 불러 네가 글을 잘 짓는다고 하니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시를 하나 지으면 죽을죄를 벗겨주겠다고 했다. 조식은 잠깐 궁리하더니 .. 더보기
류우석 양류지사 중 1수(劉禹錫 楊柳枝詞 中 1首) 류우석(劉禹錫 . 772~842) 唐나라 中期 文學者, 哲學者 낙양(洛陽)인. 자는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에 진사가 되고, 11년(795)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두우(杜佑)의 막료가 되었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했지만 영정(永貞) 원년(805) 왕숙문이 실각하자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 10년 뒤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었다가 그때 지은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다시 연주자사(連州刺使)로 전직되었다. 나중에 배도(裵度)의 천거로 태자빈객(太子賓客)과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지내 ‘유빈객(劉賓客)’으로 불렸다. 백거이(白居易)와 창화(唱和) 하면서 ‘유백(劉白)’으로도 불린다. 농민의 생활 감.. 더보기
김부식 감로사차혜소운(金富軾 甘露寺次惠素韻) 김부식(金富軾, 1075~1151) : 고려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입지(立之), 호(號)는 뇌천(雷川).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해 사녹(司錄)과 삼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1126년(인종 4)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자 묘청(妙淸) 일파가 서경천도설을 주장해 1135년(인종 13)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진압을 담당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명에 의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하였으며,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現傳) 하지 않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