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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회문시 2수(回文詩 2首) : 김시습 춘하추동사절시(金時習 春夏秋冬四節詩), 이지심 감추회문(李知深 感秋回文)

가을밤이 길고도 긴 추야장장(秋夜長長) 객지에서 홀로 지세며 평소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시구(詩句)를 화선지를 펴고 문진(文鎭 : 책장이나 종이 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주는 물건으로 쇠나 돌로 만든다)으로 고정시킨 다음 벼루에 먹물을 담고 적당히 농담(濃淡)을 맞춘 후 붓을 잡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주로 사용하는 붓의 크기는 20호(붓의 모(毛)폭이 2Cm, 모 길이가 대략 10Cm 내외) 정도로 새 붓이면 가늘고 섬세한 글을 쓸 수 있지만 마모가 심한 붓은 먹의 농담에 의한 운필(運筆)의 묘미(妙味)를 살려낼 수 있다.  

글을 쓰는 목적은 글씨보다 내용을 중심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함이기에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삐뚤빼뚤 졸필의 범주를 넘지 못하지만 어쩌다 작품용 화선지나 고급 붓을 사용할 경우 잘 쓰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다 보면 생각이 경색(梗塞)되어 운필(運筆)의 묘(妙)를 전혀 살릴 수 없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무사(無事)한 가을밤 소주 반 병 반주 삼아 기분 좋은 심신이 붓을 잡게 만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쓰는 것이 그나마 부족함을 조금 면하는 계기가 되곤 한다.

 

소개하고자 하는 한시는 한 번쯤은 접했을 회문시(回文詩)로 시를 첫머리나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의미가 통하고 시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지은 한시를 말하는데 옛 시인 묵객들이 술에 취하여 장난을 치거나 재미 삼아 지은 것이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회문시의 해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나 어색함이 없기에 이지심(李知深)의 감추회문(感秋回文)과 김시습(金時習)의 춘하추동사절시(春夏秋冬四節詩) 2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말 중에 역으로 읽어도 같은 말이 많은데… “여보안경안보여, 다시합창합시다, 소주만병만주소, 자꾸만꿈만꾸자, 다이심이전심이다, 다시올이월이윤이월올시다”… 찾아낸 사람의 재치가 넘쳐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금”이라는 단어는 역으로 읽어도 같은 뜻이 된다. 참 재미있는 우리나라 말이다.

 

회문시(回文詩)는 바둑판처럼 글자를 배열하여 중앙으로부터 선회하면서 읽어도 뜻이 통하는 것도 있다. 말하자면 순독(順讀)·역독(逆讀)·선회독(旋回讀)이 가능한 시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선회독의 시는 없어졌다.

회문시의 시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서는 중국 진(秦)나라 소백옥(蘇伯玉)의 처가 지었다는 「반중시(盤中詩)」와, 두도(竇滔)의 처 소혜(蘇蕙)가 지었다는 「직금회문시(織錦回文詩)」를 들었다.

회문시는 진(晋)나라 이후에 유행을 이루었다. 부함(傅咸)의 「회문반복시(回文反覆詩)」, 조식(曺植)의 「경명팔자(鏡銘八字)」, 양(梁) 나라 간문제(簡文帝)의 「회문사선명(回文紗扇銘)」, 진(陳)나라 유왕(留王)의 「회문(回文)」과 왕융(王融)의 「춘유(春遊)」 등이 대표적이다.

그 뒤로는 소동파(蘇東坡)의 「제직금화(題織錦畫)」·「금산사(金山寺)」 등이 유명하다. 송대까지의 회문시는 상세창(桑世昌)이 엮은 『회문유취(回文類聚)』에 망라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회문시가 유행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지심(李知深)이 잘 지었고, 죽림고회(竹林高會)에 참여하였던 문사들도 즐겨 썼다. 특히, 이규보(李奎報)는 21수나 되는 많은 회문시를 지었다.

그 중에서도 이수(李需)의 30운 회문시를 보고 지은 「차운이시랑수이회문화장구설시(次韻李侍郞需以回文和長句雪詩)」 30운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형군소(邢君紹)·달전(達全)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김시습의 「춘하추동사절시(春夏秋冬四節詩)」 4수가 유명하다. 그 한수를 예로 든다.

 

춘하추동사절시(春夏秋冬四節詩)  - 김시습(金時習)

紅杏山桃溪寂寂(홍행산도계적적) 붉은 살구 산복숭아는 시냇가에 쓸쓸히 섰고

飛燕乳鶯啼舍北(비연유앵제사북) 꾀꼬리 우는 북쪽 집에는 제비새끼 난다.

小塘春草夢依依(소당춘초몽의의) 작은 연못가의 봄풀은 꿈속에 아른거리고

暖風香霧鎖城東(온풍향무쇄성동) 안개에 잠긴 동쪽 성에는 따뜻한 봄바람 불어온다.

 

역독(逆讀 :  거꾸로 읽다.)

東城鎖霧香風暖(동성쇄무향풍온) 봄 안개는 따뜻한 바람을 타고 성 동쪽에 잠기고

依依夢草春塘小(의의몽초춘당소) 아련한 꿈속의 풀은 봄 연못에 돋아나네.

北舍啼鶯乳燕飛(북사제앵유연비) 나는 제비 어린 꾀꼬리는 집의 북쪽에서 울고

寂寂溪桃山杏紅(적적계도산앵홍) 쓸쓸한 시냇가의 복사와 산살구는 익어간다.

 

가을장마 중에서도 언뜻 비가 개면 높고 푸른 하늘이 나타나는 것이 제법 가을을 느끼게 한다. 가을을 느끼며, 고려 때의 문신 이지심(李知深)의 감추회문(感秋回文)이란 시를 감상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 밝혔듯이 회문시(回文詩)의 형태로 되어있는데, 회문시란 시를 첫머리부터 읽어도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의미가 통하고 시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지은 한시를 말하며, 한자란 문자 체계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형태이다. 일종의 언어유희에 해당하지만 옛날 시인들은 즐겨 지었고 후대에 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감추회문(感秋回文 : 가을을 느끼며 회문시를 짓다)   - 이지심(李知深)

散暑知秋早(산서지추조) 더위 흩어지고 이른 가을임을 알게 되니

悠悠稍感傷(유유초감상) 걱정스레 아픈 마음이 조금씩 느껴지네.

亂松靑蓋倒(난송청개도) 어지러운 소나무에 푸른 덮개가 쳐졌고

流水碧蘿長(유수벽라장) 흐르는 물 푸른 넝쿨처럼 길게 이어졌네.

岸遠凝煙皓(안원응연호) 멀리 언덕에는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고

棲高散吹涼(서고산취량) 누각 높아서 부는 바람 흩어져 시원하네.

半天明月好(반천명월호) 하늘 반쪽에 비친 밝은 달빛이 아름다워

幽室照輝光(유실조휘광) 방안에 밝은 빛을 그윽하게 비치는구나.

 

역독(逆讀)

光輝照室幽(광휘조실유) 밝은 빛이 비쳐 방안이 그윽하니

好月明天半(호월명천반) 아름다운 달이 하늘 반쪽 밝히네.

涼吹散高棲(량취산고서) 서늘한 바람 높은 누각에 흩어지고

皓煙凝遠岸(호연응원안) 흰 안개는 먼 언덕에 엉키었구나.

長蘿碧水流(장라벽수류) 긴 넝쿨은 흐르는 물처럼 푸르고

倒蓋靑松亂(도개청송란) 가지 쳐진 푸른 소나무 어지럽네.

傷感稍悠悠(상감초유유) 아픈 느낌이 점점 조금씩 멀어지니

早秋知暑散(조추지서산) 이른 가을에 더위 물러감을 알겠네.

 

이지심(李知深. ? ~ 1170)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주로 간관(諫官 : 고려시대 낭사(郎舍)와 조선시대 사간원·사헌부의 합칭, 또는 두 관서 관원의 총칭)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151년(의종 5) 정언으로 있으면서 간관들이 3일 동안 시사(時事 : 그때그때 일어난 일. 세상의 정세나 사건 등을 말함)를 논하여 간하는 것을 의종이 듣지 않자 홀로 2일 동안 복합(伏閤 : 나라에 큰일이 있을 적에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이 대궐 문 밖에 이르러 상소하고 엎드려 청하는 일)하여 간쟁(諫諍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간관(諫官)들이 국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던 일)하였다.

1157년 급사중(給事中)으로서 당시 의종이 환관 정함(鄭諴)에게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를 제수하자 정함의 고신(告身)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1160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다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다.

1162년 의종이 궁인(宮人)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鈞)에게 8품 관직을 주고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초수(超授)하려 하자 이번에도 그 고신에 서명하지 않다가 끝내는 왕의 종용에 못 이겨 서명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들었다.

관직이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에 이르렀고, 1170년 무신란이 일어난 직후에 다른 문신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주변의 가을정취)

단풍나무 3색이 곱게 물들었다.

 

붉게 익어가는 산수유
서리가 내릴때 더욱 붉다는 낙상홍(落霜紅)은 감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뿌리와 껍질, 잎은 소염, 지혈 작용이 있다.
노박덩굴은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덩굴나무로 다른 나무나 바위를 감고 길게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덩굴의 열매가 아름다워 담장녹화용 혹은 다른 덩굴식물들과 함께 조경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노박은 사전적으로 줄곧, 늘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박덩굴의 이름은 어디에서나 흔하게 있는 덩굴나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