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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고려사 권 106. 12~14(高麗史 卷 一百六. 十二~十四). 김구(金坵)

한시를 공부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시를 선택하라 한다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산중설야(山中雪夜)와 지포(止浦) 김구(金坵. 1211~1278) 선생의 낙이화(落梨花)가 떠오른다.

 

이제현 산중설야 : 익재 이제현 산중설야(益齋 李齊賢 山中雪夜) (tistory.com)

김구 낙이화 : 지포 김구 낙이화(止浦 金坵 落梨花) (tistory.com)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명성이 높으며 약 10년을 넘게 동시대에 함께한 인물이기도 하다. 두 시는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이런 시를 접할 때마다 지혜가 샘솟고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마침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실려있는 지포 김구선생에 대한 기록과 해설을 찾아 함께 지포선생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포 선생은 한림원(翰林院)에서 8년 동안 근무하였으며, 국학(國學)의 종5품 관직인 직강(直講)에 올랐다.

몽골 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김구 개인의 관직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던 듯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풍파가 닥쳐왔다. 최이(崔怡. ?~1249)의 아들로 권력을 승계받아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최항(崔沆.?~1257)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이다.

1247년(고종 34)에 최항은 김구에게 자신이 조성한 원각경(圓覺經)에 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을 보고 “나에게 입을 닫고 있으라는 것이냐!”며 분노하여 좌천(左遷)시켜버렸다.

최항은 극도로 권력에 예민하여 많은 조정 중신(重臣)들을 유배 보내고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김구가 정말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을 최항이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곡해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구는 속절없이 좌천되었고, 최항이 죽을 때까지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아마도 부안으로 내려가 살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문내용 중 심기를 건드렸던 시 내용을 원각경 발문취지에 부합되도록 마지막 구절 4자를 고쳐 자서(自書)와 함께 올려보았다.

이처럼 최충헌(崔忠獻. 1149~1219)으로부터 시작된  4대에 걸친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에 대한 불만을 시로서 표현하고자 했던 요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려사에 대한 원문 및 국역은(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자료를 참고하였다.

 

고려사 권 106 12~14(高麗史 卷 一百六 十二~十四). 김구(金坵)

 

金坵, 字次山, 初名百鎰, 扶寧縣人. 自幼, 善屬詩文, 每夏課, 儕輩無居右者, 皆以狀元期之. 高宗朝, 擢第二人及第. 知貢擧金仁鏡, 恨不置第一, 以己亦爲第二人, 語和范傳衣故事, 慰籍之. 坵作長啓以謝, 騈儷精切, 出人意表.

김구(金坵)는 자가 차산(次山)이고 처음 이름은 김백일(金百鎰)이며 부령현(扶寧縣 :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을 잘 지어 하과(夏課 : 고려 시대에사학() 선비들이 여름에 절에 가서 하던 공부) 때마다 동료들 가운데 그보다 더 나은 자가 없었으므로 다들 그가 과거에 장원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고종 때 차석(次席)으로 과거에 급제하자 지공거(知貢擧) 김인경(金仁鏡)이 수석(首席)을 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자기도 예전에 차석이었으므로 화·범(和范)이 의발을 전했던 고사를 들려주며 그를 위로하였다. 김구가 긴 장계(狀啓)를 지어 임금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그 변려문(騈儷文)이 정교하고 절실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었다.

 

補定遠府司錄, 同縣人黃閣寶挾憾, 摘世累, 訴有司. 權臣崔怡重其才, 營救不得, 改濟州判官. 時崔滋爲副使, 人有自京來, 報科場賦題云, ‘秦孝公據肴函之固, 囊括四海.’ 滋謂坵曰, “此題難賦, 試爲我著之.” 坵談笑自如, 亡何索筆立書, 文無加點. 滋嘆服, 語其子曰, “此詩賦之準繩, 汝謹藏之.” 以權直翰林, 充書狀官如元, 有北征錄, 行於世.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으로 임명되자 같은 고을 사람인 황각보(黃閣寶)가 그에게 감정을 품고 그 집안의 결함을 집어내어 해당 관청에 고소하였다. 권신(權臣) 최이(崔怡)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구제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할 수 없이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고쳐 임명했다. 당시 최자(崔滋)가 제주부사(濟州副使)였는데, 개경에서 온 어떤 사람이 그 해 과거에 출제된 부(賦)의 제목이 「진(秦) 나라 효공(孝公)이 효산(崤山)과 함곡관의 요새에 웅거해 천하를 차지하다」였다고 알려주었다. 최자가 김구더러 “이 제목으로는 부를 짓기가 어려우니 나를 위해 한번 지어보라.”라고 부탁하자 김구가 태연히 담소하다가 잠시 후 붓을 찾아 즉석에서 써냈는데 문장에 덧붙일 것이 없었다. 최자가 탄복하여 그 아들에게 “이것은 시부(詩賦)의 모범이니 잘 간직하여라.”라고 당부했다. 권직한림(權直翰林)으로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쓴 『북정록(北征錄)』이 세상에 전한다.

 

在翰院八年, 由堂後, 除閤門祗候, 遷國學直講. 崔沆雕圓覺經, 令坵跋之, 坵作詩曰, ‘蜂歌蝶舞百花新, 摠是華藏藏裏珍, 終日啾啾說圓覺, 不如緘口過殘春.’ 沆怒曰, “謂我緘口耶?” 遂左遷. 元宗四年, 拜右諫議大1)夫, 坵之祖僧也, 不宜在臺諫, 然以坵有才, 乃署告身. 累遷尙書左僕射, 歷樞密院副使政堂文學吏部尙書.

한원(翰院)에 재임한 지 8년 만에 당후(堂後)를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국학 직강(國學直講)으로 승진했다. 최항(崔抗)이 『원각경(圓覺經)』을 만들게 하면서 김구에게 발문(跋文)을 짓게 했는데 김구가 이런 시를 지었다.

 

蜂歌蝶舞百花新(봉가접무백화신) 벌 노래 나비춤에 온갖 꽃 새로 피니

摠是華藏藏裏珍(총시화장장리진) 이 모두가 화려함 속에 보배를 감췄구나.

終日啾啾說圓覺(조일추추설원각) 종일토록 (벌,나비,꽃 들이)노래하며 원각경을 설하니

掩卷靜坐過殘春(엄권정좌과잔춘) 책 덮고 선정(禪定)에 들며 남은 봄을 보내리.

 

(4구절 원문)

不如緘口過殘春(불여함구과잔춘) 입 다물고 남은 봄을 지내는 게 나으리라.

 

이를 본 최항이 “나보고 입 다물고 있으란 말이냐?” 하고 성을 내더니 결국 좌천시켜 버렸다. 원종 4년(1263)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 김구의 조부가 승려였기 때문에 그는 대간(臺諫)에 오를 자격이 없었지만 재능이 있다 하여 특별히 임명장에 서명하였다. 거듭 승진해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가 되었다가 추밀원부사·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王嘗賀聖節, 達魯花赤率其屬, 立於右, 內豎上將軍康允紹, 阿附達魯花赤, 亦率其黨, 胡服直入. 自比客使, 見王不拜, 及王拜, 一時作胡拜. 王怒, 不能制, 有司亦莫敢詰, 坵劾之甚力. 達魯花赤怒曰, “允紹先開剃, 遵上國之禮, 而反劾耶?” 將危之. 或以告, 坵曰, “吾寧獲譴, 豈可不劾此奴耶?”

왕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다루가치가 자기 휘하의 관속들을 거느리고 오른쪽에 서니 내수 상장군(內竪上將軍) 강윤소(康允紹)가 다루가치에게 아부하느라고 자신도 일당을 거느리고 몽고 복장을 한 채로 곧장 들어왔다. 마친 자신이 원나라 사신인 것처럼 왕을 보고도 큰 절을 하지 않았고 왕이 절을 하자 그제야 한꺼번에 몽고식으로 절을 올렸다. 왕이 노했으나 어찌하지 못했고 해당 관청에서도 감히 따지지 못했는데, 김구가 극력 그를 탄핵했다. 다루가치가 노해,

“강윤소가 먼저 머리를 깎은 것은 우리 원나라의 예법을 준수한 것인데 오히려 탄핵한단 말인가?”

하며 그를 궁지에 몰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귀띔해 주자 김구는, “내가 차라리 견책을 받을지언정 어찌 그런 놈을 탄핵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陞叅知政事, 建言, “後生怠於著述, 表箋未合律格, 宜試叅外文臣所製, 賞其能者.” 王允之, 事竟不行. 進中書侍郞平章事. 忠烈卽位, 改知僉議府事, 尋遷叅文學事判版圖司事. 舌人率微賤庸劣, 傳語多不以實, 或懷姦濟私. 坵獻議置通文館, 令禁內學館叅外年少者, 習漢語. 四年卒, 年六十八. 王曰, “坵曾拜平章事, 弔誄宜以平章書之.” 官庀葬事, 謚文貞.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승진해서는, “후진들이 저작을 게을리한 결과, 지은 표전(表箋)이 형식에 어긋나니 참외(參外) 문신(文臣)들의 저작을 시험해 보고 잘 짓는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소서.”

라고 건의해 왕의 허락을 받았으나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승진했으며, 충렬왕 즉위 후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옮겼다가 곧이어 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승진했다.

당시 통역관은 거의가 미천하고 용렬해 정확히 말을 옮기지 못했으며 어떤 때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이에 김구의 건의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고 금내학관(禁內學館)12)의 참외관 중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한어(漢語)를 익히도록 하였다.

충렬왕 4년(1278)에 죽으니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왕은 그가 과거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니 조문(弔文)에 관직을 평장사로 쓰라고 지시했다. 관청의 비용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性悃愊無華, 寡言語, 至論國事, 切直無所避. 嘗撰神·熙·康三朝實錄, 掌詞命. 時上國徵詰, 殆無虛歲, 坵撰表章, 因事措辭, 皆中於理. 回詔至云, “辭語懇實, 理當兪允.” 元翰林學士王鶚, 每見表詞, 必稱美, 恨不得見其面. 子汝盂, 官至奉翊大夫. 叔盂, 丞郞. 庶子承印, 大司成, 皆登第.

성품이 진솔하고 가식이 없었으며 과묵했지만 나랏일을 의논할 때는 꺼림이 없이 직절(直切)하게 발언했다. 일찍이 신종·희종·강종의 3대 실록을 편찬하였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식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당시 한해도 빠짐없이 원나라에서 요구와 문책이 내려왔으나 김구가 짓는 표문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문장을 구사해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따라서 원나라가 답서를 보낼 때면 “말한 것이 간절하고 참되므로 이치상 허락한다.”라고 적어왔다. 원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은 그가 지은 표문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그 미려함을 칭찬하면서 직접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아들 김여우(金汝盂)는 관직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고, 김숙우(金叔盂)는 승랑(丞郞)까지 지냈다. 서자(庶子) 김승인(金承印)은 대사성(大司成)까지 올랐으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김구(金坵) (國譯 高麗史 : 列傳, 2006. 11. 20., 東亞大學校 石堂學術院)

 

*고려사(高麗史)는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왕명으로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서이다. 세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어 문종 원년에 편찬된 기전체(紀傳體 :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열전·지·연표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의 관찬사서(官撰史書 :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이다. 태조에서 공양왕까지 32명의 왕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에서 형법지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총 139권 75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건국의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고려 무신정권기(武臣政權期)에서 우왕·창왕까지의 폐정(弊政)을 권계(勸戒)하고 교훈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 서술 태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