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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書道

왕희지 난정서(王羲之 蘭亭序)

왕희지의 난정서는 서예를 입문하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행서(行書)의 교본으로 삼는다.
당대(唐代)에 임서한 신룡본 모본(아래사진)을 주 교본으로 활용하는데.. 모본이지만 진본(?)에 비견될 수 있는 품격을 갖추고 있어 진본에 대한 신비성을 더하고 있다. 아래 일부 편집한 내용은 실크로드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깊이 있는 내용과 풍부한 자료를 근거하였기에 왕희지와 난정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왕희지(王羲之 303~361. 東晉시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書藝家), 자는 일소(逸少)이고 낭야(瑯邪)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東晉)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 된다. 왕희지(王羲之)는 비서랑(秘書郞:궁중의 서적을 관장하던 하급 관리)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임천대수(臨川大守)·강주자사(江州刺史)·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주요 관직을 얻지 못해, 351(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한다. 그는 한()나라 때 시작 된 해서()·행서()·초서()의 실용적인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킨 인물이다. ()나라 때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하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희지는 우리 나이로 59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고문서에 실려있는데. 아주 오래전 일이고 문서마다 활동 연대가 조금씩 달라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도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히 여겨졌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에서 왕희지의 글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특히 서예가들에게서는 성인(聖人)으로까지 추앙받는 인물이 왕희지(王羲之)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품격 첫머리가 서예(書藝), 군자(君子)의 첫걸음이 바로 서예에서 시작하여 서예에서 그 끝은 맺는다고 옛 선비들은 말했다.
오늘날에는 왕희지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蘭亭序)모본 십칠첩(十七帖)과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에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당연 "난정서(蘭亭序)",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契祭祀)가 열리는 기간에 41명의 문사(文士)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내려온다.
행서로 써진 왕희지의 비문(碑文)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로 일명 행서(行書)의 교과서로 불린다.
난정서(蘭亭序)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明代)(1368~1644)에는 그림의 주제로도 많이 채택되곤 했었다. 왕희지(王羲之)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난정서(蘭亭序)!
동진(東晉)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穆帝)가 즉위한 지 9년이 되던 해인 영화(永和) 9(서기 353) 음력 3 3, 당시 회계내사(會稽內史)이자 우군장군(右軍將軍)이던 왕희지(王羲之)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시 사족(士族)들과 명사(名士) 41명의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연다.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東晉)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士族)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해 자주 열리곤 했는데 삼월 삼짇날 계사(契事)의 형식을 빌린 모임이었다.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로 술 서(3)말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였으며, 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罰酒)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를 모아 철()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王羲之)가 썼고, 당시 참여한 인사 중 가장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작(孫綽)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後序)를 썼다. 이중 왕희지(王羲之)가 쓴 서문(序文)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당(唐) 나라 때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王羲之)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고려지(高麗紙)라 하며, 금견(錦繭: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을 가지고 만든 종이)) 서수필(鼠須筆:쥐수염으로 만든 붓) 28, 324자를 써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글 중 특히 갈지(之)字가 가장 많아 24자가 들어갔으나 자획에 변화가 일어 한 글자도 똑같이 쓴 글자가 없었다.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神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감탄하였고, 왕희지 자신도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난정서. 모본(神龍本)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낙관(落款)들이 찍혀 존귀함을 느끼게 한다. 낙관에는 신품(神品), 소장자 이름, 장서각, 열람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왕희지 글을 너무나 좋아한 당태종은 손에 어렵게 넣은 난정서를 평생 곁에 두고 애지중지 하였는데, 자신이 운명(殞命)할 때 난정서(蘭亭序)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유언으로 명하니, 난정서(蘭亭序)는 당 태종 능()인 소릉(昭陵)에 같이 묻혀버렸다. 이때부터 난정서(蘭亭序)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역사서들은 기술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는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여,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부르면서 국가적인 보물로 여기지만
정작 그 원작(原作)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전설 속 작품이 된 것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원본을 베껴 쓴 유명한 임본(臨本)및 모본(摹本) 만도 500여 종이 넘고, 임본(臨本)및 필사본들의 글자가 조금씩 서로 제 각각인지라 진본(眞本)의 글자가 어떠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작품이 돼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글... 난정서(蘭亭序) 지금도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종의 난정서 필사본들을 전시하고 있다. 당 빙승소 모본을 다시 신룡본이 모본한 것.
또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송나라 구양순의 임사 정무본(定武本)등이 현존하는 대표작으로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 돼 있다.
그 외에도 송나라 때 인종 조정 모본. 탁본으론 수나라 개황이 쓴 모본. 청나라 강희 황제가 쓴 모본, 청나라 강판교 모본등도 마찬가지로 박물관 소장품이다.
그 외에도 개인이 소장한 수많은 모본들이 진본을 가장한 채 대를 이어 내려오는 것 또한 많을 것이라 믿는다.

아래 臨난정서는 신룡본과 당초(唐初) 서예 3대가인 저수량, 구양순, 우세남의 글씨이다.

당대(唐代) 신룡본(神龍本) :당나라 때의 서예가 빙승소(憑承素)가 모사했다고 전해지는 "신룡본(神龍本)"으로 현재 중국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모사품 중 가장 유명하며 한때 진묵(眞墨)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 명필 저수량(褚遂良)이 임서한 황견본 난정서(黃絹本蘭亭序)

 

구양순(歐陽詢)의 임 난정서 정무본(定武本)

 

우세남(虞世南)의 임 난정서

 

조맹부(趙孟頫)의 임 난정서.


蘭亭序(난정서)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契事也(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영화 구년 계축년 늦은 봄 초승(3 3)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였는데 계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군현필지 소장함집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많은 현인들과 젊은이 나이 든 이 등 모두가 모였다. 이곳엔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와 무성한 숲 그리고 대숲이 있다.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또 맑은 시냇물과 여울이 좌우를 띠처럼 서로 비치며 둘러싸고 있기도 하며, 시냇물을 끌어들여 술잔을 띄울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둘러앉았다.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비록 거문고나 피리 같은 음악이 있는 성대한 연회는 아닐지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그윽한 감정을 나누기에 충분하도다.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 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부찰품류지성)
이날은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은혜로운 바람은 따스하고 화창했다. 고개 들어 우주의 광대함을 우러러보고 고개 숙여 만물의 풍성함을 살펴본다.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지오 신가락야)
자유롭게 눈을 들어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을 풀어놓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이 참으로 흥에 겨운 일이로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무릇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며 한평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이는 회포를 풀며 벗들과 한방에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며,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 舍萬殊靜躁不同(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또 어떤 이는 자기 내면 사상들을 끌어내어 육체 밖에서 마음대로 노닐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비록 취향이 만 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저마다 자신의 취흥이 기쁠 때는 자기 뜻을 주장하며 스스로 득의 하여 기뻐하고 만족하다가


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부지노지장지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장차 노년이 다가오리라는 것조차 잊고 즐긴다. 그러다 그가 즐기는 일에 권태를 느낄 때도 있고 감정이 옮겨가면서 변하게 되기도 하느니라.


向之所欣 俛仰之間 以爲陣迹(향지소흔 면앙지간 이위진적)
이전에 즐거웠던 일이 어느 짧은 순간에 낡은 과거사의 자취로 바뀌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 隨化 終期於盡(유불능불이지흥회 황수단 수화 종기어진)
특히 그런 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허나 목숨이 길고 짧은 건 모두 자연의 조화를 따라 마침내는 모두가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 거늘.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고인운 사생역대의 개불통재)
옛사람이 말하 길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 일이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나는 옛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까닭을 알게 될 적마다 마치 두 개의 부절을 하나로 맞춘 듯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깨닫는다.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미상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고지일사생위허탄)
그러니 옛사람들의 문장을 대할 때마다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쉬 달래지지 않는다. 죽고 사는 일이 서로 같은 일이라는 말은 허황된 말이다.


齊彭爲妄作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제팽상위망작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팽조처럼 오래 사는 일과 일찍 죽는 일이 서로 같다고 하는 말 역시 함부로 지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을 볼 때도 또한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을 지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고열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의 시들을 여기에 수록하였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도 변하겠지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이치는 서로가 같을 것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또한 장차 이 문장에 대하여 감회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