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 최충(惺齋 崔沖. 984 ~ 1068) 고려 문종 때 문신이자 대학자이며 서예가이다.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 · 월포(月圃) · 방순재(放詢齋),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부친은 최온(崔溫)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다. 22세 때인 1005년 문과에 장원,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에 우경기상시(右敬騎常侍) · 형부상서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 등을 지냈다. 1037년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가 되어 『현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041년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고, 이어서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事)로 나아가 영원평로(寧遠平虜)에 진(鎭)을 설치하고 산성 개수(改修)를 감독하였다. 1043년에는 수사도(守司徒) · 수국사(修國史) ·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1047년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여 법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서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는 공을 세웠다.
1050년에는 개부의(開府儀) · 동삼사수대전(同三司守大傳)으로서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이 되었다. 또한 서북면 도병마사가 되어 흉년을 만난 서북지방의 백성의 부역을 금지하고 국가 재정의 낭비를 금하게 하여 내정을 튼튼히 하는 한편, 변경을 자주 침입하는 동여진에게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여 국방태세를 강화하였다. 1053년에는 원로의 예우로 왕으로부터 인장(人杖)을 받았다. 1055년 수태사 · 중서령으로 퇴관한 뒤로는 최초의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당시 제자들을 '시중 최공도(侍中崔公徒)'라 했으며, 죽은 뒤에는 시호에 따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
그 무렵 구재학당을 본떠 11개의 사숙이 잇달아 개설되어 모두 합쳐 '십이공도(十二公徒)'라 했는데 그중에서도 문헌공도가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 당대의 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었다. 사후 정종묘정(靖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후에 선종(宣宗)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원주(原州)의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직산(稷山)의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 등의 비문을 지었다. 글씨도 잘 써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의 비문을 썼다. 해서의 필의가 짙은 행서는 가늘면서도 힘차다.
소개하고자 하는 최충의 시는 도인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정취와 감흥을 표현한 격조 높은 시로 평가받고 있어 이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만정월색(滿庭月色 : 뜰에 가득한 달 빛), 원 시제는 絶句(절구)로 되어있다.
滿庭月色無煙燭(만정월색무연촉) 뜨락의 밝은 달빛 그을음 없는 촛불이요
入座山光不速賓(입좌산광불속빈) 방에 드는 산 경치 청하지 않은 손님일세
更有松絃彈譜外(갱유송현탄보외) 또, 솔바람 불어 악보 없는 곡조 타고
只堪珍重未傳人(지감진중미전인) 다만 이런 진중한 경지를 사람에겐 전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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