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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설악산 봉정암 등정(雪嶽山 鳳頂菴 登頂)

혹서의 절정을 맞은 8월 첫 주 주말 사전 계획되지 않은 봉정암 등정을 하게 되었다.
설악산 대청봉은 몇 번 오른 적이 있지만 서울의 기온이 37℃로 예보되어 있어 한여름의 정점에 산행을 한다는 것은 여간 고행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영영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불현듯 집을 나서 일행과 함께 용대리에 주차, 백담사행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에 도착 오전 9시부터 본격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힘든 등정 과정에 펼쳐진 주변 경관을 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설악산 봉정암 등정

산행코스는 (백담사 -> 영시암 -> 봉정암 -> 오세암 -> 영시암 -> 백담사. 총 20.6Km)

백담사에서 출발하여 영시암 까지는 3.5Km 거리로 비교적 평탄하여 남녀노소 쉽게 오를 수 있다. 수렴동 계곡에 흐르는 물은 맑고 푸르다.

영시암(永矢庵)


약 1시간 반을 쉬지 않고 걸어 도착한 영시암(永矢庵).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 선생께서 지으셨는데 그 유래와 함께 삼연 선생의 행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 자익(子益), 호 삼연(三淵), 시호 문강(文康)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여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장에 발을 끊었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1681년(숙종 7)김석주(金錫胄)의 천거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賜死 : 사약을 받고 죽음)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호 삼연은 포천의 한탄강 삼부연(三釜淵) 폭포에서 유래한 듯하다. 『장자』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좋아하고 시도(詩道)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전(佛典)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에 초선(抄選)되고, 1721년(경종 1)집의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양구의 서암사(書巖祠),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 한성의 독충당(篤忠堂)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삼연 선생은 슬픈 가족사를 뒤로한 채 이곳 내설악 수렴동 골짜기로 들어와 살 집을 짓고 영시암을 지었다.
영시암(永矢庵) 영시"永矢" 즉 시위를 떠난 화살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본인도 풍진 세상을 등지고 홀연히 설악으로 들어와서 다음과 같이 시 영시암을 지은 내력과 비선대 풍광을 읊은 시 2수를 자서해 보았다.

영시암(永矢庵)

吾生苦無樂(오생고무락) 내 생은 괴롭고 즐거움이 없으니
於世百不堪(어세백불감) 세상 일이 모두 견디기 어렵구나
投老雪山中(투노설산중) 늙은 몸 설악산에 들어와
成是永矢庵(성시영시암) 여기 영시암을 지었노라

비선대(飛仙臺)

瓊臺俯金潭(경대부금담) 경대에서 금옥같이 맑은 담을 바라보니
右扇俳靑嶂(우선배청장) 푸른 봉우리가 부채처럼 펼쳐졌네
融時備衆妙(융시비중묘) 생길 때에 온갖 묘리를 갖추었으니
豈惟勢奇壯(기유세기장) 어찌 그 산세가 웅장하지 않겠는가?

유유히 흐르는 수렴동 계곡 작은 폭포와 소(沼)들을 만날 수 있다
계곡을 오르며 우축에 펼쳐진 기암 능선
용소폭포
이어지는 폭포의 아름다음이 잠시 더위를 식혀준다
관음폭포
쌍용폭포
구곡담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은 아름다운 폭포와 소(沼), 담(潭)을 이루고 있다.
계곡이 끝나고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해달고개(일명 깔딱고개)
봉정암을 목전에 두고 뒤돌아 바라본 풍광
봉정암 옛 적멸보궁터를 감싸고 있는 기암의 위용. 3개의 암봉 좌측 끝 부분에 석가사리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풍수학적 측면에서 봉황의 부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봉정암은 전형적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금닭이 알을 품고있는 형국이다. 사진에 보이는 옛 적멸보궁터가 둥지에 해당되며 서기가 충만한 곳으로 앞 길게 뻗은 큰 바위는 포란을 돕고 안전함을 보장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안타깝게도 근래 신축한 것으로 보여지는 적멸보궁은 사리탑을 마주하기 위해 우측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풍수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옛 적멸보궁터는 현재 기도도량의 흔적만 유지한체 산기(散氣)의 느낌을 지을 수 없다.(私見)
봉정암

봉정암(鳳頂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고도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
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 석가 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 석탑은 부처의 뇌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찰의 여느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 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이 자연 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 엽씩 16 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다.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 율사가 중국 당(唐) 나 라에 서가 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 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 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으나 중수, 신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옛 적멸보궁
근래 신축된 것으로 보이는 적멸보궁(정면 석가사리탑을 마주보고 있다)
적멸보궁에서 석가사리탑 방향을 바라본 모습(사리탑은 사진 좌측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진아래 옛 적멸보궁의 모습이 보인다)
보존처리중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1호로 지정된 봉정암 석가사리탑
봉정암 능선에서 바라본 용야장성(龍牙長城) 마치 용의 날카로운 잇빨이 길게 성곽처럼 이어진 모습이다
공룡능선(恐龍稜線)
석가사리탑에서 바라본 적멸보궁. 멀리 대청봉 정상이 펼쳐져 있다(산신의 풍모를 연상케 하는 큰 바위 : 눈섭과 굽어보는 눈, 코와 입술, 수염의 형태가 봉정암을 호위하는 신선 또는 노장의 모습이 선명하다)
용아장성의 위용
구름이 살짝 드리워진 공룡능선의 풍광
오세암으로 향하는 하산길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오세암 (천진관음보전)

오세암(五歲庵)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설악산 만경대(萬景臺)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한 암자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에 속하는 백담사(百潭寺)의 부속 암자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절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고, 옛 절터가 근처에 있어 석물(石物)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마등령이 있다.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선생께서 오세암에서 화두(話頭)와 씨름하던 차에 27세 때 공안(公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廓撤大悟)의 경지를 읊은 오도송(悟道頌)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몇 나그네 오랫동안 시름에 잠겼었네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갈파하니
雪裏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눈 속에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끼네

동자전
오세암 정면에서 바라본 풍광
백담사로 향하는 하산길 옆을 유유히 흐르는 계곡물은 더 없이 맑고 푸르다
백담사 입구에 수없이 쌓여진 작은 돌탑
백담사 극락보전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온 백담사. 지치고 힘든 산행이었지만 잔잔하게 성취감과 보람이 느껴진다.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은 설악산을 자주 찾는 이들도 가장 힘들어하는 코스이다. 처음 봉정암을 찾고자 한다면 수렴동 계곡으로 올라 동일한 코스로 하산하거나 오세암을 들러 봉정암으로 향하는 코스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무리한 코스이나 봉정암에서 1박을 하며 여유롭게 산행 계획을 세우도록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설악의 풍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산행이었으며 첫눈이 내리기 전 다시 한번 설악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