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정 박수량(三可亭 朴遂良 1475년 ~ 1546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효자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쌍한정(雙閑亭). 아버지는 박승휴(朴承休)이며, 어머니는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1504년 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 단상법(短喪法: 상례 기간을 단축시키는 법)이 엄했으나, 모친상을 당하자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 하여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고 여막에 살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1516년 김정(金淨)이 풍악산(楓嶽山)에서 오는 길에 박수량의 집을 방문해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할 때 척촉장(躑躅杖: 철쭉나무의 지팡이)을 선물하며 시를 지어 “깊은 산 층암 절벽에 찬서리 흰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간직하게나.”라 하였다. 그러자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窮村: 아주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라고 화답하였다. 뒤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는데, 그때 용궁 고을에는 송사(訟事: 소송사건)가 많았으나 판단을 명석하고 빠르게 해 적체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내고 1519년 겨울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박공달(朴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과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천성이 순수하며 후하고 소박했으며 뜻이 독실해 지조가 구차하지 않았다. 효행이 있었다. 사망 후 100여년이 지나 1645년에 마을에서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를 지냈다.
저서로는 삼가집(三可集)이 있다
위 행장에서 말 해주 듯 중종반정, 기묘사화를 겪으며 말 한마디 구설수에 올라 형장에 이슬로 사라질 수 있는 시대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시 낭음(浪吟)을 통하여 나름 소신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맑고 깊은 경포호수를 간담상조(肝膽相照)의 대상으로 진정 맑고 순수함을 견지하고자 읊었던 시 등경포대(登鏡浦臺) 2수를 통하여 그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낭음(浪吟 : 그냥 읊어보다)
口耳聾啞久(구이농아구)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인데
猶餘兩眼存(유여양안존) 아직 두 눈만은 은 그대로 있어
紛紛世上事(분분세상사) 시끄러운 세상 일
能見不能言(능견불능언) 볼 수는 있지만 말하지는 못한다오
등경포대(登鏡浦臺 : 경포대에 올라)
鏡面磨平水府深(경면마평수부심) 거울 같은 경포호 수심은 깊은데
只鑑形影未鑑心(지감형영미감심) 다만 겉모습만 비칠 뿐 마음은 비추지 않네.
若敎肝膽俱明照(야교간담구명조) 간담과 함께 비추게 한다면
臺上應知客罕臨(대상응지객한림) 경포대에 오를 사람 응당 드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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