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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굉지정각 묵조명(宏智淨覺 默照銘)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오래전 정원식(鄭元植) 박사의 ‘머리를 써서 살아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 중 유태인의 지혜를 모은 탈무드는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는 항상 백지로 남겨두어 후대들로 하여금 삶의 지혜를 이어서 기록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책을 구입하면 마지막 페이지는 빈 페이지로 남아 있는 것이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승되어 온 뜻일 것이다.
내 블로그를 살펴보면 고승들이 남긴 선시(禪詩)가 많이 등장한다. 이는 선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수양의 결과물이자 청정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기에 그냥 쓰는 것이 이니라 붓을 잡고 글을 쓰면서 깊은 뜻과 의미를 이해하고 각인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굉지선사(宏智禪師)의 묵조선(默照禪)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굉지정각은 굉지선사, 대혜종고 게송 2수(2023. 9. 7)에서 소개한바 있다. : 굉지선사, 대혜종고 게송 2수(宏智禪師, 大慧宗杲 偈頌 2首) (tistory.com)


묵조선((默照禪)은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참선을 할 때 화두나 공안을 들지 아니하고 본래 그대로의 체(體)를 비추어 보는 선, 즉 고요히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참선하는 선법을 말한다. 묵조선의 방법은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ㆍ귀(耳根)ㆍ코(鼻根)ㆍ입(舌根)ㆍ몸(身根)ㆍ뜻(意根)의 총칭) 작용의 문을 막고 지관타좌(只觀打座 : 지관(只管)은 ‘오로지’, ‘한결같이’라는 뜻. 오로지 좌선함. 한결같이 좌선함), 즉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惺惺寂寂 : 참선수행을 할 때,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에서 멍함에 빠지지 말고 항상 또렷하게 깨어 있어 산란함에도 빠지지 말라는 말)한 마음으로 좌선을 하여 한 기운을 오래 조절하면, 자연 적조원명(寂照圓明)한 본연의 빛이 밝아진다고 한다.

이러한 묵조선은 중국 송나라 시대 조동종(曹洞宗)의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그 당시 임제종(臨濟宗)의 대혜 종고선사(大慧 宗杲禪師)와 쌍벽을 이루자, 대혜 종고선사가 그의 가르침이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 가고 쉬어 가게 한다’ 하여 이를 비난하기 위하여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묵조선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看話禪)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선사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정각(宏智正覺)은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이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면서 묵조선의 원천은 달마에게 있다고 하였다.
 
굉지정각 선사의 선사상은 묵조선이다. 굉지정각의 ‘묵조명(默照銘)’에는 묵조선(默照禪)의 요의(要義)가 잘 표현되어 있어 이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즉 묵묵히 좌선하는 가운데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고 하는 것이 묵조선의 요지이다.
 
묵조명(默照銘)

默默忘言 昭昭現前(묵묵망언 소소현전) 묵묵히 언어가 끊어짐이여, 밝고 또렷하게 앞에 드러남이로다.
鑑時廓爾 體處靈然(감시확이 체처영연) 거울처럼 밝게 비칠 때에 툭 트임이여, 본체의 처소(본분자리)는 신령스럽구나.
靈然獨照 照中還妙(영연독조 조중환묘) 신령스럽게 홀로 비춤이여, 비추는 가운데 도리어 미묘함이여!
露月星河 雪松雲嶠(노월성하 설송운교) 이슬에 잠든 달과 은하수에 목욕하는 별이요, 눈 덮인 소나무와 구름으로 된 다리로구나.
晦而彌明 隱而愈現(회이미명 은이유현) 어두울수록 더욱 밝아지고 숨으려 할수록 더욱 드러남이로세!
鶴夢煙寒 水含秋遠(학몽연한 수함추원) 학이 꿈꾸는 안갯속 차가운 밤에, 물이 가을의 먼 정경까지 머금었고,
浩劫空空 相與雷同(호겁공공 상여뢰동) 무한한 세월 속에 텅텅 비었지만, 서로 어울림이 우레와 같구나.
妙存默處 功忘照中(묘존묵처 교존조중) 미묘함은 침묵 속에 존재하고, 공(功)은 비추는 가운데 잊혀지네.
妙存何存 惺惺破昏(교존하존 성성파혼)  미묘함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또렷또렷하게 혼침(昏沈)을 깨야하나니,
默照之道 離微之根(묵조지도 이미지근) 묵묵히 비추는 도는 이미(離微 : 얽매임을 벗어난 묘한 경계)의 근본이니

徹見離微 金梭玉機(철견이미 금준옥기) 이미(離微)를 꿰뚫어 살피면, 황금북이 옥 베틀에 오가고
正偏宛轉 明暗因依(정편완전 명암인의) 정(正)과 편(偏)이 완연히 굴러, 명(明)과 암(暗)이 의지함으로 인해서
依無能所 底時回互(의무능소 저시회호) 의지함에 능(能)과 소(所)가 없음이여, 그때에야 서로 하나로 돌아 가리라!
飮善見藥  檛塗毒鼓(음선견약 과도독고) 선견약(善見藥)을 마시고 도독고(塗毒鼓)를 두드린다.
回互底時 殺活在我(회호저시 살활재아) 묵(默)과 조(照)가 서로 잘 어울릴 때에 죽이고 살려냄이 나에게 달려있고
門裏出身 枝頭結果(문리출신 지두결과) 근진(根塵)의 문에서 뛰쳐나가면 가지마다 열매가 맺으리라.
默唯至言 照唯普應(묵유지언 조유보응) 침묵만이 오로지 지극한 말이 되며 비춤만이 오로지 널리 응하는 것이니
應不墮功 言不涉聽(응불타공 언불섭청) 응하되 공(功)에 떨어지지 말고 말하되 듣는 것에 동요되지 말라.
森羅萬象 放光說法(삼라만상 방광설법) 이 세상 모든 것이 빛을 발하며 설법하고
彼彼證明 各各問答(피피증명 명명문답) 저마다 증명하며 각각 묻고 대답하는구나!

問答證明 恰恰相應(문답증명 흡흡상응) 묻고 대답하며 증명하면 흡족하면서 서로 응하나
照中失默 便見侵凌(조중실묵 변견침릉) 비추는 가운데에 침묵을 잃으면 문득 침범되어 능멸을 당하리라.
證明問答 相應恰恰(증명문답 상응흡흡) 증명하며 묻고 대답하면 상응(相應)하여 기쁨 가득 하나
默中失照 渾成剩法(묵중실조 혼성잉법) 침묵 가운데에 비춤을 잃으면 흐려져서 남은 법을 이룬다네!
默照理圓 蓮開夢覺(묵조이원 연개몽교) 묵(默)과 조(照)의 이치가 원만하면 연꽃이 벌어지듯 꿈에서 깨어나고
百川赴海 千峰向岳(백천부해 천봉향악) 여러 줄기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고 천 갈래 봉우리가 큰 산을 향하는 듯
如鵝擇乳 如蜂採花(여아택유 여봉채화) 거위가 물에서 젖을 가려내듯, 꿀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默照至得 輸我宗家(묵조지득 수아종가) 묵(默)과 조(照)가 지극할 수 있으면 우리 종가의 가르침은 계승되리라.
宗家默照 透頂透底(종가묵조 투정투저) 우리의 가르침 묵조(默照)로 유정천을 꿰뚫고 아비지옥까지 꿰뚫어서
舜若多身 母多羅臂(순야타신 모다라비) 텅 빈 몸으로 자유자재 두루하며 자비의 손 닿음이 한량없으리.

始終一揆 變態萬差(시종일규 변태만차)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서 살피면 변화하는 모습의 천차만별 깨달으니
和氏獻璞 相如指瑕(화씨헌박 상여지가) 화씨(和氏)가 옥을 헌납함과 상여(相如)가 옥에 티를 가리켰듯
當機有準 大用不勤(당기유준 대용불근) 근기(根機) 따라 준거가 있으매 크게 쓰는 이는 힘들 일 없으리니
寰中天子 塞外將軍(환중천자 색외장군) 서울에 있으면 천자가 되고, 변방에 있으면 장군이 되리로다.
吾家底事 中規中矩(오가저사 중규중구) 우리 가풍의 일은 법규에도 맞고 굽은 것에도 맞으니
傳去諸方 不要賺擧(전거제방 불요잠거) 모든 곳에 전해 주어라 속이는 거양(擧揚)에 말려들지 말라.
 
修證一如(수증일여) 수행과 증득(證得)은 하나와 같아서
渠非修證本來具足(거비수증본래구족) 그 자리는 수행과 증득의 대상이 아닌 본래 구족 되어 있는 것. 
他不染汚徹底淸淨(타부오염철저청정) 그 자리는 물들거나 더러움이 없이 철저하게 맑고 깨끗한 것.
正當具足淸淨處 着得正眼(정당구족청정처 착득정안) 바로, 구족과 청정의 당처에서 바른 눈을 얻으면
照得徹 脫得盡 體得明 踐得穩(조득철 탈득진 체득명 천득온) 훤히 비춤에 모자람이 없고, 해탈에 漏가 없으며, 체달함이 밝고, 발길 닿는 곳마다 안온하다.
死生元無根蒂 出沒元無朕跡(사생완무근체 출몰원무짐적) 나고 죽는 것이 원래 뿌리도 없고 꼭지도 없으며, 생기고 없어짐도 원래 자취가 없다.
本光照頂其虛而靈(본광조정기허이영) 본래의 광명이 온몸을 환하게 비추는데 그 텅 빈 모습이 신령스럽고,
本智應緣雖寂而耀(본지응연수적이요) 근본의 지혜로 인연에 응하면 고요하지만 빛이 난다.
眞到無中邊絶前後(진도무중변절전후) 참으로 가운데와 가장자리, 앞과 뒤가 끊어진 그 자리에 이르면
始得成一片(시득성일편) 비로소 진리의 한 가닥을 얻어서
根根塵塵在在處處(근근진진재재처처) 내 몸과 바깥 경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出廣長舌 傳無盡燈(출광장설 전무진등) 광장설도 낼 수 있고, 다함없는 등불도 전승하고
放大光明 作大佛事(방대광명 작대불사) 진리의 큰 광명을 놓으며, 깨달음의 큰 불사도 짓는다.
元不借地一毫外法(원부차지일모법외) 원래 한 터럭만큼도 밖에서 빌려 온 것 아니고
的的是自家屋裏事(적적시자가옥이사) 또렷이 밝은 그대로 자기 집 안 일이다.
 
굉지정각(宏智淨覺 1091 ~ 1157)은 송(宋)대의 선종을 대표하는 승려로 산서성(山西省) 습주(隰州) 출신으로 호는 참부(僭夫), 속성은 이씨(李氏)로 본명은 인악(仁岳)이다. 11세에 출가하여 14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23세부터 단하 자순(丹霞子淳, 1064-1117)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39세부터 28년 동안 절강성(浙江省) 천동산(天童山)에 머물면서 조동종(曹洞宗)을 중흥시켰으며, 그는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일으켰다. 시호(諡號)는 굉지선사(宏智禪師)이며,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의 어록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능엄회해(楞嚴會解), 미타경소(彌陀經疏), 송고백칙(頌古百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