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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굉지선사, 대혜종고 게송 2수(宏智禪師, 大慧宗杲 偈頌 2首)

우리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다방면에 경이적이고 창의적인 특출한 민족이다. 국토면적은 작지만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대 혼란을 겪으며 빠른 시일 내에 기적을 일구며 모든 산업의 기반인 반도체, 자동차, 철강, 화학, 조선사업 등을 두루 갖춘 세계에서 몇 안되는 일류국가가 되었다. 최근 K-Pop뿐만 아니라 문화, 음식, 패션, 국방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하지만 정치 분야는 3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념적 갈등과 정쟁으로 국민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서로 표독스러운 얼굴로 대립하는 모습에서 소신(所信)은 간데없고 오로지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서로 발톱을 내 새우며 헐뜯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은 절로 한숨이 나온다. 협치(協治)라는 단어는 멀리 도망간 모양새다.

 

약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간화선(看話禪)을 제창(提唱)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와 묵조선(默照禪)의 주창자(主唱者)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선사의 두 선문 사이는 시대적 배경과 이념적으로 심각한 대립으로 맞섰으나 두 선지식의 지음(知音)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양대 선문(禪門)으로 발전시켜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으로 이어져 온 내력을 살펴보며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정치문화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천동산(天童山)은 중국 선불교의 5 대 산 중 하나다. 위치는 절강성(浙江省) 닝보시(寧波市) 은주구(鄞州區)에서 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태백산맥(太白山脈)의 봉우리 중 하나다.

그곳에 아육왕사(阿育王寺)와 천동사(天童寺) 약 25Km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사찰은 간화선(看話禪) 묵조선(默照禪)의 각기 다른 선(禪) 수행법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라는 두 선문(禪門) 있다.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는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라는 선종사(禪宗史)의 거장이 주석하며 오늘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체계를 가다듬었고,

천동사(天童寺)에서는 묵조선(默照禪)의 주창자(主唱者)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선사가 20여 년간 머물며 입적(入寂)할 때까지 대가람(大伽藍)으로 묵조선풍(默照禪風)을 드날린 곳이다.

 

묵조선의 거두 굉지정각은 간화선을 정립시킨 대혜종고와 더불어 송대(宋代)의 선종을 대표하는 선사이다.

묵조선(默照禪)은 묵묵히 앉아 있는 곳에 스스로 깨달음이 나타난다는 선풍(禪風)을 가리킨다. 남송(南宋: 1127~1279) 초기에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이 주창하였는데 묵(默)은 말이 없고 담연적정(湛然寂靜 : 담연(湛然)은 편안하고 안온하다는 안연(安然)의 뜻으로, 3계 6도의 생사윤회의 괴로움에 대해 열반의 편안함(便安) · 안온함(安穩) · 평화로움(平和) 또는 적정(寂靜)을 가리킴.)한 불심(佛心)의 체(體 : 本質), 조(照)는 조용(照用)으로서 영묘불매(靈妙不昧)한 불심의 용(用 : 作用)을 말한다.

 

그런데 대혜종고가 다소 지나치게 묵조선을 공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간화선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자 했던 대혜종고에게 굉지정각의 묵조(默照)는 방관적 태도로 비쳤다. 또한 당시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사대부들 중에 주전파는 개혁적 성향인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따르는 반면, 주화파는 묵조선을 지지함으로써 서로 대립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도 맞물려 있었다.

 

대혜종고의 거센 공격에 대해 굉지정각은 “밖에서 흘러 전하는 인연에 집착하지 말고, 일체 모든 만물이 부처임을 받아들여 그 마음이 오묘해지면 만사를 바로잡게 될 것이니, 진실로 해야 할 것은 오직 고요히 앉아서 묵묵히 참구 하는 것뿐”이라며 대응을 피했다.

 

이처럼 대혜종고와 굉지정각은 선 수행방법의 차이를 놓고 견해 차이를 보였지만,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굉지정각 선사가 입적하기 1년 전인 1156년, 대혜종고는 굉지정각을 만나기 위해 천동사를 불쑥 방문했다. 그리고는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됐는데 개당법회(開堂法會)의 백추사(白鎚師)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백추사란 주지가 처음 법석에 올라 법좌를 펼 때, 주지의 상당(上堂 : 선종의 장로나 주지가 법당의 강단에 올라가 설법함)이 원만하게 이뤄졌음을 증명하는 법사를 일컫는다. 이때 굉지정각은 그토록 자신을 비난하던 대혜종고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굉지정각이 백추사 역할을 수락한 것은 대혜종고의 주지 자격을 인정한 것이다. 대혜종고 또한 그토록 맹렬히 비난하고 부정했으면서도 자신의 개당(開堂)에 굉지정각을 찾아가 백추사로 청한 것은 그 역시 굉지정각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1년 뒤, 원적에 든 굉지정각은 묵조선을 따르는 후학들을 젖혀두고,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종고에게 후사를 당부했다.”

굉지정각이 입적하자 대혜종고는 크게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바야흐로 깃발은 꺾이고 대들보가 부러져 법의 강은 마르고 법안(法眼)은 없어지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진정 천동(굉지정각)의 진실한 말이 무엇인지 서슴지 말고 말하라. 지음(知音)을 안 뒤에 또 누가 아는가.”

 

굉지선사(宏智禪師)  임종게(臨終偈)

夢幻空花(몽환공화) 꿈같고 환영 같은

六十七年(육십칠년) 아아, 육십칠 년이여

白鳥煙沒(백조연몰)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秋水天連(추수천연) 가을 물이 하늘에 닿았네.

 

대혜종고와 굉지정각 두 선사는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겉으로 서로 대립해야 했지만 속내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공감했음을 굉지의 임종에 이르러 세상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두 선사를 선문(禪門)의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이라 칭송했다.

 

굉지선사 천동정각(宏智禪師 天童正覺. 1091 ~ 1157)은 송나라 때의 조동종(曹洞宗) 승려로 시호는 굉지선사이다. 산서(山西) 습주(隰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하남(河南) 남양부(南陽府) 등주(鄧州) 단하산(丹霞山) 자순선사(子淳禪師)의 법사(法嗣)로,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杲)와 함께 당시 이대감로문(二大甘露門)으로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장로사(長蘆寺)에 머물렀고, 나중에 절강(浙江) 은현(鄞縣) 천동산(天童山)에서 30여 년 동안 있었다. 만송행수(萬松行秀)가 일찍이 『송고백칙(頌古百則)』을 기초로 삼아 따로 『종용록(從容錄)』을 지었다. 그 선풍(禪風)을 묵조선(黙照禪)이라 부르는데, 종고의 간화선(看話禪)과 대조되어 공안(公案)을 채용하지 않고 좌선(坐禪)을 통해 내재한 자유로운 경지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소흥(紹興) 27년 10월 입적했고, 세수(世壽) 67세다. 시호는 굉지선사(宏智禪師)고, 탑명은 묘광(妙光)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중국 송나라시대 선승(禪僧)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며, 속성은 해씨(奚氏), 대혜(大慧)는 호, 종고(宗杲)는 법명으로, 지금의 중국 안휘성(安徽省-안후이성) 선성시(宣城市)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신인(神人)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얼굴은 검고 코는 오뚝했다. 침실에 이르렀기에, 그 스님의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했다. 잠을 깨고 보니 태기(胎氣)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찬란한 빛이 방을 비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기이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대혜는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그가 열두 살 때 하루는 서당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먹물 통을 던졌는데, 그만 선생님의 모자에 맞고 말았다. 먹물을 뒤집어쓴 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어린 학동은 300냥의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다.

그가 돌아와 말하기를, “세간의 서적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궁구(窮究)하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더니, 16세에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 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지막에 <벽암록(碧巖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 문하에 들어가 임제선(臨濟禪)을 수행해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눈을 떴다.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스승 원오극근 열반 후, 1137년에 항주(杭州)의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로 옮겨가 선종을 크게 선양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와 설법을 들었고, 제자만도 2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당시 송 황제였던 효종(孝宗)에게 설법을 하고 ‘대혜선사(大慧禪師)’란 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선사를 부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라고 한다.

선사가 75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을 남기고 고요 속으로 떠난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열반송(涅槃頌)

生也祗麽(생야지마) 삶이 이러하고

死也祗麽(사야지마) 죽음이 이러하나니

有偈無偈(유게무게) 게송이 있고 없고

是甚麽熱(시심마열) 무엇을 그리 마음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