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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사찰 주련(柱聯)이야기 주련(柱聯)이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마다 시구를 연달아 걸었다는(聯)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원래는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그냥 기둥에 붙이거나 혹은 얇은 판자에 새겨 걸었던 것이 후대에 발전하여 지금은 일정한 양식을 갖춘 주련으로 발전했다. 법당에 걸려있는 주련은 판 위아래에 연 잎이나 연꽃, 혹은 당초 무늬를 새겨 다듬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는데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써넣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 한 특징이 있다. 내용은 부처님 말씀이나 선사들의 법어나 선시가 주 내용이다.사찰의 기둥이나 벽에 성구를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기둥 마다 부처님 성구나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 더보기
두보 시 곡강(杜甫 詩 曲江) - 고희의 유래(古稀의 由來) 나이 일흔 즉 70세를 표현할 때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 말한다. 과거에는 환갑잔치에 많이 참석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70세 고희연(古稀宴)도 가족과 함께하는 추세다 보니 초대받는 경우도 드물게 되었다. 어느새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장수국가에 속하는 나라가 되었다. 옛날 나이를 말할때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하여 지학(志學), 20세를 젊은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 30세를 뜻을 세운다 하여 이입(而立), 40세를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다하여 불혹(不惑),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하여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세상이치를 이해한다 하여 이순(耳順), 인생 70세를 넘기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줄여서 고희(古稀)라 한다. 고희는 .. 더보기
도연명 도화원기(陶淵明 桃花源記) 도연명(陶淵明)은 앞서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언급하였기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 글은 왕조 교체기의 문란하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도연명은 만년무렵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형상화하여 그려낸 이상향이다. 도화원기(桃花源記) 또는 도화원시(桃花源詩) 라고 하는 것은 도연명집의 도화원시 병기(桃花源詩 幷記)라는 시문을 도화원기와 도화원시가 분리되어있다. 도화원시는 도화원기에 대한 시로 차제에 소개토록 하겠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추구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오랜 농촌 생활 가운데에서 얻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살려서 그려낸 도화원(桃花源)은 이후 동양적 유토피아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그가 꿈꿔왔던 무릉도원은 지금까지도 우리가 그리워하고.. 더보기
제갈량 출사표(諸葛亮 出師表) 제갈량의 출사표는 문장이 유창하고 뜻이 간절하여 역대 고전산문 가운데 명문장으로 꼽는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동한(東漢) 말 낭야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 출신으로 촉(蜀)의 승상(丞相)을 지냈다. 자는 공명(孔明)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일찍이 형주(荊州)의 융중(隆中)에서 난리를 피해 있을 때 ‘와룡(臥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유비(劉備)를 도와 삼국(三國) 정립(鼎立)을 이루었고, 유비가 죽자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면서 여러 차례 위(魏)를 공격하였다. 위장(魏將)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오장원(五丈原)의 군중(軍中)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출사표(出師表)는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기 앞서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을 말한다. 제갈량이 촉한(蜀漢) 건흥(建.. 더보기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세숫대야 명문(銘文)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경기도 과천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이며,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 더보기
이광정 천근(李光庭 賤近)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멀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보이고 가까이 있는 현재의 소중함을 잊고 이상만 쫓다 보면 허망함을 느끼며 후회를 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가까운 것이 더 소중하다는 이광정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게재된 내용들을 참고로 선인들의 귀감이 되는 내용을 추려 마음속 깊이 새겨보고자 한다.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에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그를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훈도장(安東府訓都長)으로 삼았다. 또한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도 조현명이 그를 문학과 행의(行誼)가.. 더보기
제갈량 계자서(諸葛亮 誡子書) 제갈량 계자서(諸葛亮誡子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계자서는 제갈량이 아들에게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훈계하는 편지이다. 전체 내용 중 일부를 자서해 보았다. 夫君子之行(부군자지행) 무릇 군자가 행함에 있어 靜以修身 儉以養德(정이수신 검이양덕) 고요한 마음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써 덕을 기르는 것이다. 非澹泊無以明志(비담백무이명지) 마음이 담백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非寧靜無以致遠(비녕정무이치원)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배울 때는 반드시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재능은 반드시 배움을 필요로 한다. 非學無以廣才 非靜無以成學(비학무이광재 비정무이성학)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힐 수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학문을 이룰 .. 더보기
맹자 왈 궁불실의 달불이도(孟子 曰 窮不失義 達不離道) 급변하는 세태변화와 함께 물질주의에 물들어 가는 현세대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이 급격히 퇴색되어 가고 있다. 구고심론(求古深論)이란 옛것의 좋은 점을 심도있게 논의하여 새로움을 발견하고 배우고자 하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쯤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있어 자서한 글과 함께 그 뜻을 살려보고자 한다. 유가의 선비정신은 의(義)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함과 검소함이 있다. 공손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孟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 더보기
도연명 귀거래사(陶淵明 歸去來辭)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유명인사가 이임 시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세사(世事)에 시든 몸과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전원으로 돌아 감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가슴에 와 닫는 시다. 도연명에 대하여는 앞서 "도연명의 음주"에서 간단하게 소개되었기에 참고 바라며, 귀거래사 서두 일부를 黑紙에 銀墨으로 自書해 보았다. 귀거래사(歸去來辭) 도연명(陶淵明 365~427) 歸去來兮(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어찌 홀로 근심하고 슬퍼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더보기
소식 전적벽부(蘇軾 前赤壁賦) 소식(蘇軾)은 앞 소동파(蘇東坡)의 무진장(無盡藏)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나라 제1의 시인이자 문장가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이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필화(筆禍) 사건으로 죄를 얻어 황저우(黃州:湖北省)에 유배되었던 소동파가 1082년(元豊 5)의 가을(7월)과 겨울(10월)에 황저우성 밖의 적벽에서 소식과 여러 객이 함께 놀다가 지은 것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前..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