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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허혼 조추 3수(許渾 早秋 3首)

도심의 출근길은 빌딩 숲과 간간히 동일 수종의 가로수를 맞이하는데 도심 밖의 풍경은 출근길을 즐겁게 하며, 황금물결 넘치는 논과 주변의 숲은 어느덧 초가을의 풍경이 펼쳐지고  눈으로 보는 사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어 객지에서 보내는 일상에 큰 위안이 된다.

몇 일전 타계한 산남 김동길(山南 金東吉 1928~2022) 교수의 88세 때 생전 강의 내용(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세계사를 통해 본 한국인)에 세월의 흐름을 인생에 빗대어 봄 여름은 여유롭게 가지만 가을부터는 겨울은 빠르게 지나가고 인생의 가을에 해당되는 4,5~60대의 시간은 40은 한 살, 한살이 총알처럼 지나가고 50에서 60은 55세를 헤아리지만 이후의 시간은 7,8,90이 순간처럼 흘러감을 실감 있게 말씀하신 육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세대를 같이 했던 노학자의 명강의는 유튜브를 통해서 언제든 경청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하다.

세월의 흐름은 예와 다름없이 하루가 아쉽고 더디 가기를 바라지만 돌아서면 겨울을 맞이하듯이 당 시인 허혼의 조추를 살펴보며 지나온 삶을 관조해 보고자 한다.

 

조추(早秋 : 이른 가을) 3수(三首)

 

其一.

遙夜泛淸瑟(요야범청슬) 긴긴밤 청아한 비파소린가 싶었더니

西風生翠蘿(서풍생취라) 가을바람에 사철 푸른 덩굴이 내는 소리

殘螢委玉露(잔형위옥로) 드물어진 반딧불 이슬 사이에 앉아 있고

早雁拂銀河(조안불은하) 기러기는 줄을 지어 새벽하늘을 날아가네

高樹曉還密(고수효환밀) 새벽녘 키 큰 나무 가지 여전히 무성하고

遠山晴更多(원산청갱다) 비 개이자 저 멀리 산들 겹쳐 보이는데

淮南一葉下(회남일엽하) *회남의 나무들은 시든 잎을 떨구고

自覺老烟波(자각노연파) 이 몸은 안개 짙은 물가에서 늙어가네

*회남(淮南 :  당나라의 방진명(方鎭名 : : 당 시대 8節度使가 있던 지역)으로 회수(淮水) 이남 지역을 말하며, 주로 양주(揚州) 일대를 다스렸음)

 

 其二.

一葉下前墀(일엽하전지) 나뭇잎 앞 계단에 하나 둘 떨어지니

淮南人已悲(준남인이비) 회남에 사는 사람은 벌써 슬프다

蹉跎青漢望(차타청한망) 높은 벼슬을 바라나 시간은 흘러가고

迢遞白雲期(초체백운기) 신선이 되고자 하나 요원하기만 한데

老信相如渴(노신*상여갈) 늙어서 믿을 것은 사마상여의 소갈병이요

貧憂曼倩饑(빈우만청기) 가난하여 근심인 것은 동방삭의 굶주림이다

生公與園吏(싱공여원사) *생공과 더불어 속세를 떠나 진리를 찾고자 하나

何處是吾師(하처시오사) 어느 곳에 나의 스승을 찾을 수 있으리오

*상여갈(相如渴 :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소갈병(消渴病 : 지금의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에 ‘상여갈’이라 불렀다)

*생공(生公 : 남북조 때 사람. 호구산(虎丘山)에서 불경(佛經)을 강(講)했으나 믿는 사람이 없어서 돌을 모아 놓고 신도(信徒) 삼아 지극한 이치를 이야기하니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함)

 

其三.    

薊北雁猶遠(계북안유원) *계북의 기러기는 아직도 멀리 있어

淮南人已悲(회남인이비) 회남에 사는 사람은 이미 슬프진다

殘桃間墮井(잔도간타정) 남아있는 복숭아는 간간히 우물에 떨어지고

新菊亦侵籬(신국역침이) 새롭게 핀 국화 또한 울타리를 감싼다

書劍豈相誤(서검기상오) 서금(文과 武)은 어찌 서로를 헛되이 하는가

琴尊聊自持(금존료자지) 거문고와 술통으로 잠시나마 스스로를 의지하네

西齋風雨夜(서재풍우야) 서재에는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야밤에

更有詠貧詩(갱유영빈시) 다시 가난을 노래하는 영빈시를 읊는다오

*계북(薊北 : 북경(北京) 덕승문(德勝門)의 서북쪽 지역으로, 춘추 전국 시대 연(燕) 나라 지역을 말한다)

 

허혼(許渾 791 ~ 854년 추정) 당나라 윤주(潤州) 단양(丹陽) 사람으로 조적(祖籍)은 안륙(安陸)이고, 자는 용회(用晦) 또는 중회(仲晦)다. 허어사(許圉師)의 6 세손이다. 문종(文宗) 태화(太和) 6년(832) 진사에 급제하여 도주현령(涂州縣令)과 태평현령(太平縣令)을 지냈는데, 병으로 사직했다. 오랜 뒤에 윤주사마(潤州司馬)로 재기했다. 선종(宣宗) 대중(大中) 연간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과 목주(睦州) 및 영주(郢州)의 자사(刺史)를 지냈다. 나중에 병 때문에 윤주 정묘교(丁卯橋) 촌사(村舍)에 은거했다. 그래서 논집(論集)을 정묘집(丁卯集)이라 했다. 젊어서부터 고학(苦學)하고 병이 많았지만 임천(林泉)을 애호했다. 율시(律詩)에 뛰어났는데, 등고회고(登高懷古)한 작품이 많았다. 만당(晩唐) 시대의 명사(名士)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