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寒露)가 지난 지 몇 일되지 않았는데 조석으로 초겨울의 날씨처럼 차갑다. 기온이 4℃로 내려가면 산간지방에는 서리가 내린다. 원래 서리는 이슬이 내리고 나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이슬이 얼어서 서리가 된다. 서리가 내리면 대부분의 식물은 냉해를 입게 되는데 내한성이 강한 몇 종의 농작물 외에는 서리 내리기 전 수확을 해야 한다. 내가 가꾸고 있는 텃밭도 배추, 무, 당근만 남겨놓고 수확을 거의 마친 상태다. 수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올 농사는 집중호우로 인한 파농(破農)이나 다름없다. 서울 대모산 기슭에 올해 가꾼 텃밭의 풍경을 앞서 사진과 함께 실어봤다.
이번에 살펴볼 내용은 고운 최치원이 천령군(天嶺郡 : 지금의 경남 함양군) 태수로 있을 때 당시 존망받던 고승(高僧)인 희랑화상에게 쓴 절구로 당초 10 수인데 현재는 6 수만 전한다.
희랑 화상은 통일 신라 시대에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승으로, 고운과 시문(詩文)으로 사귀었고, 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 뒤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귀의를 받았으며, 견훤의 귀의를 받은 관혜(觀惠)의 남악(南岳)에 대항하여 북악(北岳)이라는 일파를 세웠다. 그의 목상(木像)이 해인사에 있다.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희랑대(希朗臺)는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와 관련하여,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蹟)의 기록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희랑대덕 군이 하절기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였는데, 나는 오랑캐를 막아 내느라고 청강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노래하되, 5측(側) 5평(平)을 써서 10절을 지어 장(章)을 이루어서 그 일을 기린다.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希朗大德君 夏日於伽倻山海寺 講華嚴經 僕以捍虜所拘 莫能就聽 一吟一咏 五側五平 十絶成章 歌頌其事 防虜太監 天嶺郡守 遏粲 崔致遠)”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은 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해인사 조사(祖師)였던 고려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우리나라에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이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다. 2020년 국보 제999호로 지정되었다.
희랑은 북악파의 종주(宗主)로서 진면목을 적절하게 묘사하여 화엄종의 진리를 무언(無言)의 형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는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스님은 비문과 영정을 허락하지 않고 열반에 들었는데 후학들은 그 유지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은사를 기억할 묘안을 내었다. 나무, 삼베, 종이, 옻 등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희랑 스님 노년의 생생한 모습을 완벽하게 조성했다.
고운선생은 만년에 가야산에 머물며 고승들과 교유하며 시를 남겼는데 불교에 심오한 경지를 이룬 자만이 소통 가능한 용어가 많아 범부가 그 영역을 이해하기란 지난(至難)하여 고역원에서 역한 내용을 참고하였다.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 희랑 화상에게 증정하다)
其一.
步得金剛地上說(보득금강지상설) 금강 같은 참다운 지혜의 말씀 모아
扶薩鐵圍山間結(부살철위산간결) 미륵보살이 철위산에서 결집하였네
苾蒭海印寺講經(필추해인사강경) *필추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의하니
雜花從此成三絶(잡화종차성삼절)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라
*필추(苾蒭 : 범어(梵語) bhikṣu의 음역으로 비구(比丘)라고도 하며 희랑을 가리킨다.)
其二.
龍堂妙說入龍宮(용당묘설입룡궁) 용당의 묘설을 용궁에서 들여온 뒤
龍猛能傳龍種功(용맹능전룡종공) 용맹이 용종의 공을 제대로 전했네
龍國龍神定歡喜(용국룡신정환희) 용궁의 용왕이 정녕 환희함은 물론이요
龍山益表義龍雄(용산익표의룡웅) 용산은 의룡의 걸출함을 더욱 표하리라
其三.
磨羯提城光遍照(마갈제성광편조) *마갈제성의 광명이 두루 비치고
遮拘盤國法增耀(차구반국법증요) *차구반국의 불법이 더욱 빛나네
今朝慧日出扶桑(금조혜일출부상) 오늘 아침 부상에서 떠오른 지혜의 해
認得文殊降東廟(인득문수강동묘) 문수가 동묘에 강림한 것을 알겠도다
*마갈제성(磨羯提城 : 마갈다국(摩竭陀國)과 같다.)
*차구반국(遮拘盤國 : 차구가국(遮拘迦國)과 같다. 서역(西域)의 우전국(于闐國)에서 동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의 국왕이 특히 대승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서 궁중에 반야(般若)ㆍ대집(大集)ㆍ화엄(華嚴) 등 3부(部)의 대승 경전을 봉안하고 전독(轉讀)의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당나라 승려 지승(智昇)이 지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7에 보인다.)
其四.
天言祕敎從天授(천언비교종천수) 진실한 말 비밀스러운 가르침 하늘이 주었고
海印眞詮出海來(해인진전출해래) 해인의 참된 깨달음 바다에서 나왔네
好是海隅興海義(호시해우흥해의) 훌륭하여라 바다 한구석에서 깊은 뜻 일으켰으니
只應天意委天才(지응천의위천재) 그야말로 하늘의 뜻을 천재(天才)에게 맡겼네
其五.
道樹高談龍樹釋(도수고담룡수석) *도수의 고담은 용수가 해석했고
東林雅志南林譯(동림아지남림역) *동림의 아지는 남림이 번역했네
斌公彼岸震金聲(빈공피안진금성) *빈공이 피안에서 금성을 떨쳤다지만
何似伽倻繼佛跡(하사가야계불적) 가야에서 부처의 자취를 이은 것과 같으리오
*도수(道樹).. : 용수가 《화엄경》에 대한 논을 지어 해설했다는 말로, 그가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을 저술하여 화엄경의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다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을 지어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일부를 주석한 것을 가리킨다. 도수는 보리수(菩提樹)를 가리킨다.)
*동림(東林.. : 동진(東晉)의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혜원(慧遠)의 제자 법령(法領)이 차구반국(遮拘盤國)에 가서 화엄의 전분(前分) 3만 6천 게송을 구해 왔고, 불현 삼장(佛賢三藏)이 화엄경을 번역할 적에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이 구술한 내용을 붓으로 적어 50권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동림과 남림이 협조한 인연을 언급한 대목이 고운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나온다. 불현(佛賢)은 각현(覺賢) 혹은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라고도 한다. 아지(雅志)는 경전을 완전히 구비하여 번역하려 했던 혜원의 평소의 뜻이라는 말이다.)
*빈공(斌公 : 남림사(南林寺) 법업(法業)의 제자가 되어 화엄경을 전수받고 강경(講經)의 제 일인자가 된 담빈(曇斌)을 가리킨다.)
其六.
三三廣會數堪疑(삼삼광회삭감의) *삼삼의 광회의 숫자는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十十圓宗義不虧(십십원종의부휴) *십십의 원종의 뜻이야 잘못될 리가 있겠는가
若說流通推現驗(야설류통추현험) *유통을 말한다면 *현험을 밀고 나가야 하리니
經來未盡語偏奇(경래미진어편기) 경의 미진한 해석은 문자가 이상한 탓이로다
*삼삼(三三)의 광회(廣會) : 부처가 《화엄경》을 설한 아홉 차례의 법회
*십십(十十)의 원종(圓宗) :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교리를 펼치는 화엄종(華嚴宗)을 말함
*유통(流通 : 불법(佛法)을 먼 지역까지 빠짐없이 전파하여 말세 중생이 모두 봉행하게 해야 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
*현험(現驗 : 지금 분명히 드러나 증험이 되고 있는 사실)
(해석 : 古譯院(譯) 참조)
희랑(希郞) 스님은 신라 진성여왕 3년 을유(乙酉 889)에 거창군 주상면 성기(聖基)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나이 78세 때인 고려 광종(7년) 966년 병인년에 입적하신 분이다. (* 한찬석, 합천해인사지. 거창군사편찬위원회 자료)
스님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의 하대(下代 : 780~935)에 속하며, 이 시대는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수없이 일어난 반란으로 통일 신라는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잃고 국가적인 혼돈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스님이 출가한 해인사는 802년 순응(順應) · 이정(利貞) 스님의 창건 이레 이들 스님의 뒤를 이은 결언(決言) 스님과 현준(賢俊) 스님(최치원의 친형)의 활약으로 신라 왕실과 밀접히 교류하면서 신라 말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면모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두 왕조에 걸쳐 생존했던 희랑대사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희랑대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 균여(均如 917~973 고려 전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공목장기(孔目章記) 등을 저술한 승려)“스님은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대가가 계셨다. 한 분은 관혜공(觀惠公)인데 백제 견훤의 복전(福田 : 불교신앙의 대상인 부처 또는 승려의 호칭)이 되었고, 한 분은 희랑공(希郞公)인데 태조 왕건의 복전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초심 때는 향화를 올리며 서원을 맺었으나 어른이 되어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겠는가!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였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일컬어 남악(南嶽)이라 하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北嶽)이라 일컬었다.”
‘가야산 해인사 고적’ 사료에
“신라의 말기에 승통 희랑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시면서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적에,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의 왕자 월광(月光)으로 더불어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왕건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건은 해인사에 들어와서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백제 월광이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지(田地) 오백결(五百結)을 드리니 스님은 옛 사우(寺宇)를 새로 중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지리적으로 해인사는 후백제에서 신라에 이르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대에 놓여 있었고, 해인사와 멀지 않은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일대전투를 벌인 왕건은 휘하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 많은 장수들을 잃고 패배하였으며 자신도 겨우 사지에서 탈출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목숨이 위급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심복인 신숭겸과 장수들을 잃은 정신적인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왕건은 희랑스님에게 귀의하여 용기와 각오를 돈독하게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화엄학에 있어 북악파의 대표였던 희랑스님은 왕건의 존사(尊師)와 복전이 되어 고려 건국을 돕게 되었고, 국가적인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크게 중창하고 화엄학을 크게 융성케 하였으며 이적(異蹟)을 많이 남기신 고승이었다.
'삶의 향기 > 차한잔의 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은 정몽주 호중관어 2수(圃隱 鄭夢周 湖中觀魚 2首) (0) | 2022.10.14 |
---|---|
허혼 조추 3수(許渾 早秋 3首) (0) | 2022.10.13 |
익재 이제현 소상팔경 시(益齋 李齊賢 瀟湘八景 詩) (0) | 2022.10.06 |
남해 금산 보리암(南海 錦山 菩提庵)과 범종각(梵鐘閣) (0) | 2022.09.29 |
오음 윤두수 시 몇 수(梧陰 尹斗壽 詩 몇 首) (0) | 2022.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