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향곡 혜림대종사 게송 몇 수(香谷 蕙林大宗師 偈頌 몇 首)

향곡당(香谷堂) 혜림대종사(蕙林大宗師, 1912~1979)는 현대 한국불교에 선풍(禪風)을 드날린 선지식이다. 스님은 경허(鏡虛)-혜월(慧月)-운봉(雲峯)으로 내려오는 선맥을 이어받았다. 근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선지(禪旨)로 불교의 위상을 높혔으며, 확철대오(廓撤大悟)의 경계를 얻은 도인의 삶의 영위하며 법거량(法擧量)을 통한 인가(認可)와 법전(法傳)으로 한국 불교계의 근간을 이룬 대 종사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수행이력과 함께 게송 몇수를 자서해 보았다.

“우리가 본래 출가한 목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짓고 수리하는 등의 모든 불사도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공부인을 위해 해야지 명예나 욕심이나 다른 생각으로 하게 되면 죄만 지을 뿐이다.

이 법은 오직 바르고 참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만 성과가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못 입고 못 먹어 중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자꾸 늦추어 ‘내생(來生)에 하겠다’는 생각을 내면 절대로 안 된다.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중략) 선방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 이가 먹고 입는데 정신이 팔려서는 이 정법(正法)을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다.

모름지기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받는 사람이 풀려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언제나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편안함과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은커녕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이 일어날 뿐이다.

어떤 사람이 단식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람들이 배가 부르니까 온갖 야단들을 하는 구나. 명리도 여자도 재산도 다 배가 부를 때 탐이 나는 것일 뿐 배가 고프니 아무 생각도 없어라? 이 말과 같이 일체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부 하나만 하면 성취 안 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예전 스님네는 하루해가 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그렇게 애써 공부를 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1976년 동화사 법문 중에서)

수행이력

향곡스님은 1912년 1월18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원묵(金元默), 어머니는 김적정행(金寂靜行)이다. 16세 때 이미 승려가 된 둘째 형에게 옷을 전하기 위해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산천경개의 빼어남이 완연히 전생에 머물렀던 곳과 같음을 느끼고 환희하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조성월(趙性月)선사를 은사로 득도(得度), 법명을 혜림(蕙林)이라 했다.(1929년).

23세 때 범어사 원효암에서 운봉(雲峰)스님을 친견하고부터 스님을 시봉하며 정진에 몰두했다. 1940년 하루는 운봉스님이 “목침을 목침이라 하지 말고 일러 보라”고 했다. 향곡스님이 바로 일어나 목침을 발로 차버리자 운봉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것은 그만두고 다시 일러라” “천 마디 만 마디의 말이 모두 꿈속에서 꿈을 설함입니다.”

이에 운봉(雲峯)스님이 ‘법자(法子) 향곡(香谷)에게 부촉하노라’하고 전법게와 함께 ‘향곡(香谷)’이란 법호를 내렸다.

傳法揭(전법게 : 운봉스님이 향곡에게)

西來無文印(서래무문인) 서쪽에서 전래된 무늬 없는 인장은
無傳亦無受(무전역무수) 전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것일세
苦難無傳受(고난무전수) 전하느니 받느니를 모두 떠나면
烏兎不同行(오토부동행) 해와 달은 함께 동행하지 않으리라

향곡스님은 1947년 문경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다. 성철 청담 보문 자운스님 등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용맹정진했다.

어느 날 도반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殺盡死人하야사 方見活人이요 活盡死人하야사 方見死人이라 하니 會)?” 이 말 끝에 문득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니 삼칠일(21일) 동안 마음이 마치 담벽과 마주한 듯하여 잠자고 먹는 것까지 모두 잊고 정진했다.

하루는 문 앞을 지나다가 홀연히 당신의 양손을 발견하고 확철대오 하여 게송을 읊었다.

悟道頌(오도송)

忍見兩手全體活(인견양수전체활) 홀연히 두 손을 보고 전체가 들어났네
三世佛祖眼中花(삼세제불안중화)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로다.
千經萬話是何物(천경만화시하물) 천경과 만론들은 이 무슨 물건인가
從此佛祖總喪身(종차불조총상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1951년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스님은 부산 선암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수많은 납자를 지도했다. 그 때의 개당설법(開堂說法)은 이러하다.

開堂說法(개당설법)

鳳岩一笑千古喜(봉암일소천고희) 봉암사에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曦陽數曲萬劫閑(희양수곡만겁한)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다.
來年更有一輪月(내년갱유일윤월)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金風吹處鶴唳新(금풍취처학려신)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이 새롭구나.

1955년(44세) ‘종단정화’ 후 불국사 주지를 맡았고 경주 천경림 흥륜사를 중창했다. 1957년 묘관음사 중창불사를 하고 1959년(48세) 묘관음사 길상선원 조실. 이후 중앙선학원 이사장과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납자들을 지도했다. 1967년 8월 진제(眞際)선사에게 법을 전했다.

傳法揭(전법게 : 향곡 -> 진제)

佛祖大活句(조불대활구)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무전역무수)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付活句時(금부활구시)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放任自在(수방임자재)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맞기노라

1968년 묘관음사 중창불사를 회향했다. 1977년 9월 경북 선산 도리사에 스승 운봉스님의 탑비(塔碑)를 건립했다(2000년 묘관음사로 이운). 1978년 12월18일(양력 1979년1월16일) 묘관음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랍(法臘) 50년, 세수 67세. 장례는 전국선원장으로 다비를 했다.

臨終揭(임종게)

木人嶺上吹玉笛(목인령상취옥적) 목인이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石女溪邊亦作無(석녀계변역작무) 석녀는 사냇가에서 또한 춤을 추도다.
威音那畔進一步(위음나반진일보) 위음광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歷劫不昧常受用(역겁불매상수용) 영원히 밝고 밝아 언제나 수용하리

“향곡선사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방하며 섬세한 면도 갖추었다. 키가 크고 골격도 커서 보기만 해도 사자후를 날릴 것 같은 인상을 지녔으나 의외로 어린애 같이 순수한 감성을 지녔다. 명예에 급급하지 않고 팔도를 유람하며 일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런가하면 자연을 사랑해 꽃과 나무를 도량에 많이 심고 가꾸어 큰스님이 주석했던 월내 묘관음사는 사철 푸른 잎과 꽃이 가득한 선경이 되었다(법념스님이 쓴 향곡큰스님 일화 <봉암사의 큰 웃음>중에서).

향곡스님이 불국사 주지로 있을 때 석굴암 주지는 지월스님이었다. 정화 전 석굴암에 살던 대처승이 지월스님을 찾아왔다. “스님, 석굴암 앞에 있는 큰 소나무들이 석굴암을 가리고 있어 석굴암에 습기가 찹니다. 베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월스님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그 대처승은 경찰서에 이 일을 고발했다. 그 대처승은 지월스님의 천진성을 악용, 자기가 쫓겨난데 대한 앙갚음으로 한 짓이었다. 향곡스님까지 싸잡아 불국사 주지가 석굴암의 풍치림(風致林)을 베어 없앴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향곡스님이 경찰서에 갔다. “이 일은 모두가 본사 주지인 내 잘못이니 나를 처벌하시오.” 지월스님은 “아니오, 내가 한 짓이니 내가 벌을 받아야지요.” 두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본 경찰서에서는 지월스님이 사흘간 유치장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향곡스님이 묘관음사 도량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원주소임을 보는 상좌 혜원스님이 그 은행나무가 커가자 더 잘 자라라고 큰 가지는 놔두고 곁에 나온 잔가지를 모두 잘라냈다. 스승님께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그리했다. 스승 향곡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뭐든지 윗사람에게 물어서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하는 놈과는 같이 살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옷 벗고 나가라’고 했다. 혜원스님은 이 일로 절에서 쫓겨날 뻔 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혜원스님은 꽃과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가꾸었다. 향곡스님은 혜원스님이 이런 울력을 할 때는 늘 곁에서 지켜보았다. 간혹 뿌리를 잘못 건드리면 혼을 내곤 했다. 뿌리가 다치면 나무나 꽃의 생명에 지장을 주니까 그리 상좌를 나무란 거다. 혜원스님은 늦게 서야 스승이 왜 그리 하신지를 알게 됐다고 한다. 꽃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놈이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는 경책임을.

평생도반 ‘향곡과 성철’

향곡스님과 성철스님은 평생 도반이었다. 향곡스님이 열반하자 성철스님은 당신보다 앞서 간 향곡스님을 이렇게 기렸다.

‘향곡형을 곡하며(哭 香谷兄)’ “슬프도다. 이 종문에 악한 도둑아 하늘 위 하늘 아래 너 같은 놈 몇일런가. 업연(業緣)이 벌써 다해 훨훨 털고 떠났으니 동쪽 집의 말이 되든 서쪽 집의 소가 되든 애닯고 애닯도다 갑을병정무기경(哀哀宗門大惡賊 天上天下能幾人 業緣已盡撒手去 東家作馬西舍牛 甲乙丙丁戊己庚)” 도우(道友) 성철(性徹).

[불교신문3420호/2018년9월1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