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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연암 박지원 연암억선형(燕巖 朴趾源 燕巖憶先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앞서 전가(田家)에서 소개한 바 있다. 비록 우수한 산문을 남긴데 비해 시는 매우 적다. 하지만 깊이 있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소개하자 하는 시 또한 동 시대에 극찬을 받은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형은 부모 맞재비” 라는 말이 있듯이 연암은 자신보다 18년 먼저 세상을 등진 형에 대한 그리움을 아버지와 형, 자신을 대입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燕巖憶先兄(연암억선형 : 연암이 앞서 간 형을 그리워 하며..)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스스로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이 시는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의 핍박(逼迫)을 견딜 수 없어 개성 외곽에 있는 연암에 숨어 살 때 선형(先兄)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과정록(過庭錄) 권(卷)1에 의하면, 정조 11년(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는데,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燕巖古文詞 才思溢發 橫絶古今 橫絶古今(연암고문사 재사일발 횡절고금) : 연암(燕巖)은 고문사(古文詞)에 있어서 재사(才思)가 넘치고 고금에도 통달하였다. 

 

時作平遠山水 踈散幽迥 優入大米之室 其行書小楷 得意時作 逸態橫生 奇奇恠恠 不可方物(시작평원산수 소산유형 우입대미지실 기행서소해 득의시작 일태횡생 기기괴괴 불가방물) : 당시 지은 평원(平遠)한 산수(山水)에 깊은 감회를 소산(疏散)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대미[大米, 송나라 미불(米芾)을 가리킨다]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고, 마음이 내킬 때 쓴 그의 행서(行書)와 해서(楷書)는 뛰어난 자태가 넘치며, 너무도 기묘하여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다.

 

甞有詩曰 水碧沙明島嶼孤 鵁鶄身世一塵無(상유시왈 수벽사명도서고 교청신세일진무) : 일찍이 읊은 시에, ‘푸른 물 맑은 모래 외로운 섬에, 교청(해오라기)처럼 맑은 신세 티끌 한 점 없다네.’

 

亦知其詩品入妙 但矜愼不出 如包龍圖之笑比河淸 不得多見 同人慨恨(역지기시품입묘 단긍신불출 여포룡비지소비하청 부득다견 동인개한) : 이것으로써도 그의 시 품격이 오묘한 지경에 도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다만 긍신(矜愼)하여 잘 내놓지 않으므로, 마치 하청(河淸)에 비유된 포룡도(包龍圖)의 웃음과 같아서 많이 얻어 볼 수 없으니, 동인(同人)들이 못내 아쉬워했다.

 

甞贈我五言古詩 論文章 頗宏肆可觀(상증아오언고시 논문장 파굉사가관) : 일찍이 나에게 오언(五言)으로 된 고시론(古詩論)을 기증하였는데, 폭넓은 문장력이 볼만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