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치적 치적 비가 내리고 있다. 극심했던 봄 가뭄을 한번에 해소할 많은 비가 장마기간에 끊임없이 내린다. 이처럼 비 내리는 밤은 글씨 쓰기에 제격이다. 소개하고자 하는 시는 선조(宣祖)의 손자인 해원군 이건((海原君 李健)이 남긴 400여 수 중 마음에 담고 있던 몇 수를 야우중(夜雨中)에 자서해 보았다. 이귀(李貴)의 모함으로 9년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7년 동안 제주도에서 보고 느낀 생활과 풍습을 기록한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가 있다. 그가 꿈꾸었던 강남의 봄풍경, 산중에서의 삶, 제주도 유배길 해남을 지나며, 가을을 읊은 높은 격조가 흐르는 시와 함께 당시 3절(三絶)로 칭송이 자자했던 해원군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종실(宗室) 중 가장 뛰어난 명필은 당연코 비해당 안평대군(匪懈堂 安平大君)이다. 비록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사(賜死)되었지만 그의 명성과 서법은 송설(松雪)을 능가하고도 남을 필법으로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가장 안타깝고 아까운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 글씨에 능했던 인물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해원군 이건(海原君 李健, 1614년 ∼ 1662년)은 조선의 왕족 종실(宗室 : 임금의 친족)이다. 본은 전주(全州), 자(字)는 자강(子强), 호(號)는 규창(葵窓)이다.
인성군 이공(仁城君 李珙)의 3남(三男)으로 출생한 그는 일찍이 1619년 해원정(海原正)에 책봉되었는데 아버지 인성군이 반정공신(反正功臣) 이귀(李貴)의 핍박 섞인 모함으로 인하여 모반역모(謀反逆謀) 혐의를 받자 1628년을 기하여 형 해평군(海平君) · 해안군(海安君), 아우 해양군(海陽君) 등과 아울러 역신의 후손이라 하여 전라도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뒤 1635년 전라도 제주에서 경상도 울진으로 이배(移配)되었고 2년 후 1637년 석방되었다.
20년 후 1657년 해원군(海原君)에 진책(進冊)되었으며 이후 청렴한 성품을 발휘하여 자신의 사저(私邸)에 조그만 서실(書室)을 짓고 그곳에서 한시와 시조를 작시와 아울러 서예와 서화에 열중하여 당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특히 그림은 송죽(松竹)과 영모(翎毛 : 새나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가 뛰어났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며, 저서에는 규창집(葵窓集) 등이 있다.
강남춘(江南春 : 강남의 봄날)
聞說江南又到春(문설강남우도춘) 소문에 들으니 강남에 또 봄이 와
上樓多少看花人(상누다소간화인) 누각에 올라 꽃구경하는 사람 많다지
牧童橫笛驅黃犢(목동횡적구황독) 목동은 피리 불며 소몰이하고
兒女携筐採白蘋(아녀휴광채백빈) 처녀들 광주리 끼고 *마름을 따네
* 마름 : 마름과의 한해살이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줄기는 물속에서 가늘고 길게 자라 물 위로 나오며 깃털 모양의 물뿌리가 있다. 잎은 줄기 꼭대기에 뭉쳐나고 삼각형이며, 잎자루에 공기가 들어 있는 불룩한 부낭(浮囊)이 있어서 물 위에 뜬다. 여름에 흰 꽃이 피고 열매는 핵과(核果)로 식용한다. 연못이나 늪에 나는데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구황식물(救荒作物)로 어렸을 때 채취하여 쌂아 먹었던 기억이 있다. 밤 맛과 비슷해 '물밤' 이라고도 한다.
산중(山中)
春山多草木(춘산다초목) 봄 산에는 초목도 너무나도 많아서
樵路細難分(초로세난분) 나무꾼이 길 좁아 분간하기 어려운데
匹馬煙霞裡(필마연하리) 말과 같이 노을 속을 헤치면서 지나가노라니
猶疑上白雲(유의상백운) 머리 위로 흰 구름 하염없이 흘러가네
해남도중(海南途中 : 해남가는 길에)
三湘魚雁絶(삼상어안절) 삼상에 물고기와 기러기 보이지 않고
萬里鶺鴒孤(만리척령고) 만리를 떠도는 할미새는 외로워라
去去多歧路(거거다기로) 갈수록 더욱 갈림길이 많아지니
何時得坦途(하시득탄도) 어느 때라야 평탄한 길 걸을 수 있을까
숙*별도포(宿別刀浦 : 별도포에 묵으며)
夜宿別刀浦(야숙별도포) 별도포에서 밤을 묵으니
波聲喧枕邊(파성훤침변) 파도소리 베개 곁에서 일렁이는데
思親愁不寐(사친수불매) 어버이 생각에 시름에 잠겨 잠 못 드는 밤
哀淚自潸然(애루자산연) 슬픔에 겨워 눈물이 절로 흐른다.
*별도포 : 제주시 화북동에 있었던 포구
추효(秋曉 : 가을의 새벽)
風急灘聲大(풍급탄성대) 바람 거센 여울물 큰 소리 우렁차고
江空落葉飛(강공락엽비) 쓸쓸한 강가에는 흩날린 낙엽 소리
捲簾仍一望(권렴잉일망) 주렴을 걷어니 가을이 한눈에 모두 들어오고
天畔月斜輝(천반월사휘) 하늘가엔 비스듬한 달빛이 밝아오는구나
걸국화(乞菊花 : 국화를 취하여)
淸秋佳節近重陽(청추가절근중양) 맑은 가을 아름다운 계절 중양절 가까이
正是陶家醉興長(정시도가취흥장) 때마침 도가의 집 같이 늘 흥겹게 취하네.
想見傲霜花滿砌(상견오상화만체) 섬돌 가득한 꽃 오상고절 생각하며 보니
可能分與一枝香(가능분여일지향) 한 가지 국화향 능히 나누어 베풀어주네.
조선시대 어필(御筆)에 뛰어났던 임금을 살펴보면
제5대 문종(文宗. 1414~1452·재위 1450∼1452)이 묘호(廟號)에 걸맞게 문장과 시, 글씨 솜씨가 걸출했다.
9대 성종(成宗. 1457~1494·재위 1469∼1494)의 글씨는 아름답고 고우면서도 단정하고 정중하여 조용히 조송설(원의 서화가 松雪 趙孟頫)의 정신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할 정도이며 그림에도 능통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과 비견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14대 선조(宣祖. 1552~1608·재위 1567∼1608)도 글씨를 잘 써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는 난초와 대나무 그림도 탁월했으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완당집(阮堂集)에서 "우리나라에는 난초를 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엎드려 살펴보니 선조의 어화(御畵)는 하늘이 내린 솜씨로서 잎사귀 그리는 법과 꽃을 그리는 격조가 정소남(鄭所南. 1241~1318 중국 宋末元初의 화가)과 꼭 같다"라고 했다.
16대 인조(仁祖. 1595~1649) 역시 그림에 능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정원군(定遠君)의 장자(인조)가 상감(선조) 앞에서 그림을 그리니 상감이 그 그림을 (신하들에게) 내려주고 이어 품계를 더해 주었다"라고 했다.
21대 영조(英祖. 1694~1776)는 긴 통치 기간만큼이나 숱한 글씨를 남겼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 영조는 글씨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1820~1898)의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서울 출신으로 영조의 증손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부터 당숙인 추사 김정희에게 글과 그림을 배운 만큼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유명했으며 특히 난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작품에는 김정희의 영향이 많이 들어있는데, 말년으로 갈 수록 흥선대원군 자신만의 특징을 담아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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