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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소나무 관련 한시 몇 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좋아하는 나무를 꼽으라면 제일 먼저 소나무를 선택할 것이다.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는 고결한 자태로 혹독한 풍상을 겪으며 사시사철 푸르름을 선사하며 늘 우리 곁에 머물고 있고, 유서 깊은 마을의 동구(洞口)나 언덕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고목으로 예로부터 뛰어난 기품을 자랑하는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소나무가 베푸는 요소들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안정감과 함께 솔에서 내뿜는 솔향기, 송화, 송진, 송이, 복령 등 은 귀한 맛과 고급 약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렸을 때 배 고픔을 달래 주었던 송기, 소나무를 불태우면 기름기 때문에 그을음이 많이 생겨 이를 모아 만든 먹을 송연묵(松烟墨)이라 했으며, 타고 남은 재는 지혈 등 먹는 약재와 고약을 만드는 주 재료인 소나무는 인간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한 혜택을 선사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소나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요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건축의 최고급 목재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선호하는 정원수, 분재의 소재로도 가장 인기가 높다. 예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문인들로부터 그림이나 시의 소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등 일부 국가의 환경에 적응하며 자생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매우 귀한 수종이다. 급변하는 기후변화로 향후 50년 후면 소나무도 점점 사라지는 수종이 될 것이라는 끔찍한 예측이 빗나가기를 기대해 보며, 평소 여유 있을 때 수묵 졸작으로 그려본 소나무 몇 점과 함께 한시 몇 수를 자서해 보았다.

 

소나무 잡시(雜詩)     - 이황중(李黃中)

松子隨長風(송자수장풍) 바람에 솔 씨 날아와

偶然生屋角(우연생옥각) 우연히 집 모퉁이에 싹을 튀었네

柯葉日已長(가엽일이장) 가지와 잎 하루하루 커가고

庭宇日已窄(정우일이착) 마당은 하루하루 비좁아졌네

持斧繞其下(지부요기하) 도끼 들고 그 밑을 돌았어도

再三不忍斫(재삼불인작) 끝내 차마 베질 못했네

卜日拔宅去(복일발택거) 날을 택해 집을 옮겨 떠났더니

鄰里指狂客(린리지광객) 이웃들이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하네

 

감산자 이황중(甘山子 李黃中 1803 ∼ 미상)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자는 공일(公一)이고, 호는 감산자(甘山子),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이규보(李奎報)의 후손으로 문장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쳤으며, 평생 기인으로 살았다.  만년에 금낭(錦囊)을 제재로 시를 지었는데, 동시대 중국의 문인 부보삼(符葆森)은 1857년 국조정아집(國朝正雅集)을 편찬하며, 이황중의 시적 성취를 특별히 부각시키고, 조선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부보삼은 특히 이황중의 율시에서 보여준 비애의 서정과 정밀한 대우(對偶)를 높이 인정했다.

소나무(松)     - 박인로(朴仁老)

池上亭亭百尺松(지상정정백척송) 연못 위에 우뚝 솟은 백 척 소나무

寒天斜日翠浮空(한천사일취부공) 추운 날 해 질 녘 하늘에 둥실 짙푸르네

四時不變專孤節(사시불변전고절) 사시사철 오로지 고절 함을 유지하는 것은

肯畏嚴霜與疾風(긍외엄상여질풍) 엄동 서리와 질풍을 견뎌 내기 때문이라네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 조선 선조 때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ㆍ무하옹(無何翁)이다.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났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막하(幕下)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 성윤문(水軍節度使 成允文)의 발탁으로 종군, 1598년 외군이 퇴각하자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가사(歌辭) 태평가(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 · 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나포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군비(軍備)를 증강하는 한편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퇴관 후 고향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많은 걸작을 남기고, 1630년(인조 8) 노령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애국심 · 자연애(自然愛)를 바탕으로 천재적 창작력을 발휘, 시정(詩情)과 우국(憂國)에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장가(長歌)로는 송강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독특한 시풍(詩風)을 이룩하고 가사문학(歌辭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작품 전체의 구상이 웅장하면서 문체가 질박(質朴)하고 유려(流麗)하기 때문에 정철(鄭澈),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3대 시가 작자로 평가받고 있다.

영천의 도계향사(道溪鄕祠)에 제향 되었으며, 무집(文集)에 노계집(蘆溪集), 작품에 태평가(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 가사 작품과 시조 60여 수를 남겼다.

 

송죽문답(松竹問答 : 소나무와 대나무의 대화)     - 이식(李植)

松問竹(송문죽) 솔이 대에게 말을 걸었다.

風雪滿山谷(풍설만산곡) 눈보라 몰아쳐 산골 가득해도

吾能守强項(오능수강항) 나는 강직하게 머리 들고서

可折不可曲(가절불가곡)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는 않는다오.

竹答松(죽답송) 대가 솔에게 대답했다.

高高易摧折(고고역최절) 고고할수록 부러지기 쉬운지라

但守靑春色(단수청춘색) 나는 청춘의 푸르름 고이 지킬 따름

低頭任風雪(저두임풍설) 머리 숙여 눈보라에 몸을 맡긴다오.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 이안성(李安性)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1613년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이듬해 선전관청 선전관을 지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27년(인조 5)에는 충주 목사가 되었다. 1641년(인조 19)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찬수를 주관하였다. 그 뒤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앞서 영신연(詠新燕)시에서 택당선생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장송표(長松標)      - 신흠(申欽)

春來不加色(춘래불가색) 봄이와도 그 빛을 더하지 않고

寒至不渝色(한지불투색) 겨울이 되어도 그 빛이 바래지 않네

從他長風掉(종타장풍도) 바람이 몰아치면 흔들려주고

任地飛雪白(임지비설백) 흰 눈이 날려도 내맡겨 두네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 ∼162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으로 앞서 상세히 소개하였기에 생략하겠다.

 

 

우화동(羽化洞 : 우화동에서)   - 이만용(李晩用)

浣腸明月磵(완장명월간) 밝은 달 계곡물에 세속에 찌든 마음 씻고

又手白雲峰(우수백운봉) 다시 멋스럽게 백운봉에 올랐네

願醉死埋此(원취사매차) 원컨대 술에 취해 죽은 다음 여기에 묻힌다면

化爲千尺松(화위천척송) 아름드리 높다란 소나무가 되리라

 

*우화동(羽化洞) : 경기도 연천군 중면 대사리(북한 지역)에 마을로 임진강변의 낭떠러지 상부에 우화정(羽化亭)이 있었으나 조선말에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만용(李晚用 ~ 미상)은 조선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자는 여성(汝成), 호는 동번(東樊), 본관은 전주(全州). 진사 명오(明五)의 아들로 1858년(철종 9) 문과에 급제, 벼슬이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을 잘해서 명성이 조선 후기 사대가(四大家)로 뽑히며 명류(名流)와 창수(唱酬 : 시(詩)나 문장을 지어 화답(和答)함)한 시가 많다. 정약용(丁若鏞), 윤정현(尹定鉉), 조두순(趙斗淳) 등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저서는 동번집(東樊集)이 있다.

 

 

등현시동년서원(滕縣時同年西園) 시두(詩頭)    - 소식(蘇軾)

人皆種楡柳(인개종유유) 사람들은 모두 느릅나무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坐待十畝陰((좌대시무음) 울창한 그늘이 생기기를 앉아서 기다리지만

我獨種松柏(아독종송백) 나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어 놓고

守此一片心(수차일편심) 변치 않는 이 마음을 지키려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