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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사가정 서거정 시 삼복, 수기, 춘일, 백국, 불개국화, 울산태화루(四佳亭 徐居正 詩 三伏, 睡起, 春日, 白菊, 菊花不開.., 蔚山太和樓)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만약 서거정이 없었더라면 이런 아찔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을 것이다. 한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명저들은 지극한 나라사랑과 국토에 대한 확고한 개념은 독자적 지리지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울산태화루(蔚山太和樓) 시를 통해 마도(馬島 :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확실하게 표시하고 있어 향후 우리나라 국력이 일본을 앞설 때 중요한 사료적 요소로 인식될 수 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서거정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동국여지승람은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라는 기록과 세종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소서를 며칠 앞둔 요즈음 폭염이 하늘을 찌르는 날씨가 호우와 함께 연일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위의 절정기인 7월 말에 무더위에 해당되는 날씨로 연일 특보가 이어지고 있어 여름철 건강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가정 선생 역시 이와 같은 날씨에 향기 스민 차네 얼음 몇 조각 넣은 냉차를 마시며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자 했던 삼복 시와 함께 알려진 명시 몇 수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삼복(三伏)

一椀香茶小點氷(일완향다소점빙) 한 잔의 향 스민 차 조그마한 얼음 띄워,
啜來端可洗煩蒸(철래단가세번증) 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었구나.
閑憑竹枕眠初穩(한빙죽침면초온) 한가하게 죽침(竹枕) 베고 단잠이 막 드는 차에,
客至敲門百不應(객지고문백불응) 손님 와서 문 두드려도 백 번 인들 대답 않네.

그 시절 여름에 조그만 얼음 뛰워? 당시 이전부터 한겨울 조상의 지혜를 담은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고(石氷庫)가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얼음을 관리하는 사람을 빙고전(氷庫典)이라 했고 조선시대 들어와 이를 빙고(氷庫)라고 해 관리에 많은 인원을 동원한 기록을 보아 여름에 귀한 얼음을 왕족 외 사대부, 관직이 높은 신하, 70세 이상 신하, 심지어 감옥의 죄수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이를 반빙제도(頒氷制度)라 한다.

수기(睡起 : 잠에서 깨어나)

簾影深深轉(렴영심심전) 주렴 그림자는 깊숙이 들어오고
荷香續續來(하향속속래) 연꽃 향기는 끊임없이 풍겨오네
夢回孤枕上(몽회고침상) 꿈에서 깨어 외로운 목침 위로
桐葉雨聲催(동엽우성최) 후드득 오동 잎에 빗소리 최촉 하네

춘일(春日 : 봄날에)

金入垂楊玉謝梅(금입수양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 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新水碧於苔(소지신수벽어태) 작은 연못의 새 물이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誰深淺(춘사춘흥수심천) 봄 시름과 봄 흥취 중 어느 것이 더 깊고 옅은지
燕子不來花未開(연자불래화미개) 제비는 아직 오지 않았고 꽃도 피지 않았네.

이 시는 50대 말에 지은 칠언절구 회(灰) 운으로, 서거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만큼 넉넉하고 화사한 분위기가 섬세한 정서와 기교적인 표현으로 잘 드러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무르녹는 봄날의 흥취라기보다는 아직은 봄의 한기가 남아 있고, 봄의 온기가 화창하게 퍼지기를 기다리는 중간적 경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봄날의 중간적 의미를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유롭고 한가한 관인 생활의 여유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백국(白菊 : 흰 국화)

輕盈玉蘂殿秋開(경연옥예전추개) 나긋나긋 옥같은 꽃술이 가을 집에 피니
氷雪精神欲鬪梅(빙설정신욕투매) 빙설 같은 정신은 매화와 겨루려 하네
相對無言淡如水(상대무언담여수) 말없이 서로 대하니 맑기가 물과 같고
更看明月上梢來(경간명월상초래) 다시 바라보니 밝은 달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네

국화불개 장연유작(菊花不開 脹然有作 : 국화가 피지 않아서 실망하여 지음)

佳菊今年開較遲(가국금년개교지) 올해는 국화꽃 피기가 매우 늦은데
一秋情興漫東籬(일추정흥만동리) 가을의 정감과 흥취는 동쪽 울타리에 넘치는구나.
西風大是無情思(서풍대시무정사) 가을바람은 참으로 무정도 하지
不入黃花入鬚絲(불입황화입수사) 황국화에는 들지 않고 귀밑털에 들었네.

이 시는 60대 말 만년에 지은 칠언절구 지(支) 운으로, 국화로 표상된 가을의 정취를 인생의 황혼에 연결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우선 제목으로 보아 국화꽃 피기를 몹시 기다리다가 서운한 심정으로 이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구에서는 시상을 전환해서 가을바람이 조락(凋落)의 계절을 몰고 온 것이 무정하다고 한탄한 다음에, 결구에서 조락의 계절이 황국화에 들어서 그 꽃을 피우지는 않고 도리어 자신의 귀밑털에 들어서 늙음을 재촉하였다고 읊었다. 시절이 늦어 국화가 늦게 피는 것을 보면서, 어느덧 조락의 계절은 바로 자신에게 와 있음을 절감하고 담담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정신과 이를 재치 있게 표현해 낸 솜씨가 놀랍다고 할 것이다. 그가 관직에 몸담은 지도 40여 년, 이제는 관인으로서 영욕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여유로운 만년에 와 있는 것이다.

*울산 태화루(蔚山太和樓)

蔚州西畔太和樓(울주서반태화루) 울산 서쪽 언덕에 있는 태화루
倒影蒼茫蘸碧流(도영창망잠벽류) 거꾸로 선 그림자 푸른 물에 잠기어
汗漫初疑騎鶴背(한만초의기학배) 너무나 아득하여 학을 탔나 했더니
依俙却認上鰲頭(의희각인상오두) 어렴풋이 알겠네, 자라 머리에 올랐음을
山光近接鷄林曉(산광근접계림효) 산 빛은 가까이 계림 새벽에 닿았고
海氣遙連馬島秋(해기요연마도추) 바다 기운은 대마도까지 가을을 이었네
萬里未窮登眺興(만리미궁등조흥) 만리 타향에서 조망의 흥취 못다 한 채
萬天風雨倚欄愁(만천풍우기난수) 하늘 만리 비바람 속, 난간에 기대어 시름 젖네

*태화사 태화루(太和寺 太和樓) :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울산 태화동 인근에 창건하였다. 자장이 당나라로 건너가 수도하던 중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한 신인이 나타나서 호국을 위하여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라 하고, 또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하여 경주 남쪽에 한 절을 지어주면 덕을 갚겠다고 하였다. 귀국 후 자장은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중국에서 모셔온 불사리를 세 몫으로 나누어 이 절에 태화탑을 세우고 한몫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고려 명종 때의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태화루시서(太和樓詩序)」와 충숙왕 때 울주에 있었던 정포(鄭誧)의 태화루시(太和樓詩), 그리고 이원(李原, 1368∼1429)의 「태화루시」에도 태화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지(寺址)는 반탕골을 중심으로 한 황모산(黃茅山) 일대로 추정되며, 유물로는 십이지상부도(十二支像浮屠)만이 전하고 있다. 이 부도는 1966년 3월 보물 제441호로 지정되었으며, 반탕골 태화사지 산비탈에 묻혀 있다가 1962년에 발굴되어, 경상남도청에 잠시 보관되다가 학성동 학성공원으로 옮겨졌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우리나라 석종형부도의 시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윗부분의 깊이 판 감실(龕室) 아래에 나체상의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십이지신상 연구에도 소중한 유물이 되고 있다.
서거정이 태화루를 찾을 때도 태화사는 존재했다. 현재는 정확한 터는 발굴하지 못했으나 당시 불사리를 봉안한 기록으로 보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과 높은 누각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 지기를 기대해 본다.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 1420 ~ 1488년)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신으로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淸麗)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 : 우리나라 최초의 命理書)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復配)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共編)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 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敍用 : 벼슬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관직을 주어 씀)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撰進 :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림)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 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缺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생을 마감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