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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학산 허균 시 입춘, 서춘첩(鶴山 許筠 詩 立春, 書春帖)

내일은 24 절기 중 긴 겨울의 문턱을 넘어 봄으로 들어서는 입춘(立春)이다. 입춘은 새해의 첫째 절기이기 때문에 농경의례(農耕儀禮)와 관련된 행사가 많다. 입춘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각 가정에서는 기복적인 행사로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문설주(柱 : 문짝을 끼워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에 붙인다. 입춘축을 달리 춘축(春祝)·입춘서(立春書)·입춘방(立春榜)·춘방(春榜)이라고도 하는데 “입춘방 문구” 등은 8년 전 이 블로그에서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이 46세 되던 해 반년을 북경에서 보내며 입춘을 맞이해 지은 시 입춘(立春)과 서춘첩(書春帖)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천재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학산 허균((鶴山 許筠)이 지은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에 실려있는 시로 그가 동지(同知) 겸 진주사행(冬至兼陳奏使行)의 부사(副使)로서 광해군 7년(1615) 9월 6일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향했다가 이듬해 3월 1일에 의주로 귀환하여 3월 중 평양에 이르기까지 지은 382수의 시들을 모은 기행시집이다.

 

비록 49세의 나이에 역모로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당시 걸출한 학자이자 시.서.화(詩.書.畵)에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선각자이다.

약 400여 년 전 이 맘 때쯤 그가 타국에서 맞이하는 봄의 감흥을 함께 느껴 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입춘(立春)

烏蠻館裏逢立春(오만관리봉입춘) *오만관 안에서 입춘을 맞이하니,

螭陛幾時頒鳳綸(이폐기시반봉륜) 대궐 뜰에 왕의 *윤음 몇 번이나 내리셨나?

莫恨羇蹤猶上國(막한기종유상국) 나그네 발자취 상국에서의 한 없을소냐

共喜皇仁霑遠人(공희황인점원인) 황제의 어지심은 먼 곳 사람 감동시켜

條風細細吹紫蘌(조풍세세취자어) 동북풍 간들간들 대궐에 불어오고,

旭日纚纚輝彤宸(욱일이이휘동신) 떠오르는 햇살은 붉은 대궐 비쳐 주네.

菜盤銀勝且節物(채반은승차절물) 나물 밥상 풍성한데 철철 산물 더욱 좋아

想見故園梅柳新(상견고원매유신) 고국의 매화 버들 새잎들 보는 듯 하네.

 

*오만관(烏蠻館 : 중국 남쪽 지방의 오랑캐인 오만(烏蠻)의 사신들이 북경(北京)에 왔을 적에 묵던 관소(館所)

*윤음(綸音 : 왕이 국민에게 내린 훈유((訓諭)의 문서)

 

서춘첩(書春帖 : 춘첩을 쓰다)

帝城春色鎖千門(제성춘색쇄천문) 북경성 봄빛이 집집이 문을 열고,

紫禁烟花麗日暄(자금연화려일훤) 대궐 안엔 안개꽃과 고운 해가 인사하네.

但得心安身少病(단득심안신소병) 오직 내 몸 병은 적고 마음 편키 원했더니,

此身淸福盡皇恩(차신청복진황은) 이 몸의 맑은 복은 모두가 황은이네.

新年所祝豈高官(신년소축기고관) 새 해의 축원이 어찌 고관 됨이겠나?

乞得關東蕩節還(걸득관동탕절환) 좋은 때에 휴가 얻어 관동으로 돌아가리.

束取圖書五千卷(속취도서오천권) 도서 5천 권을 무더기로 가져와,

弊廬依舊四明山(폐려의구사명산) *사명산에 의지한 헌 초가에 두고 보리라

 

*사명산(四明山 : 현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경포호(江原道江陵市草堂洞鏡浦湖) 주변에 있는 사주산(四柱山)을 이른 듯함)

 

학산 허균(鶴山 許筠 1569 ~ 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 학산(鶴山) · 성소(惺所) · 백월거사(白月居士),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허균의 누이이며, 부친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 ·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엽(許曄)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 : 조선 중종과 선조 대에 걸쳐 시명(詩名)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백광훈, 최경창, 이달)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워 시의 묘체(妙諦 : 묘한 진리. 또는 뛰어난 진리)를 깨달았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94년 26세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 :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에서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정칠품 벼슬)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에 사예(司藝 : 조선 시대에, 성균관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정사품 벼슬) ·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에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 : 서자의 계통)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609년에 명나라 책봉사(冊封使 : 국왕이나 왕비, 태자 혹은 세자 등을 책봉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보낸 사신)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殿試 : 조선 시대에, 복시(覆試)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임금이 친히 치르게 하던 과거)의 시관(試官)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庶流)출신의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으며 왕의 신임을 얻어 예조참의를 거쳐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 : 선 시대에, 중국 황제ㆍ황후ㆍ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신)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이듬해 1615년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에 좌참찬(左參贊 :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한 정이품 문관 벼슬. 삼정승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였다)이 되었다.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에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인 것이 탄로 났다.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총명하고 영발(英發 : 번쩍번쩍 광채가 남)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異端)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다.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으며,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예교(禮敎)에 얽매었던 당시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났으며,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古詩選)』, 『당시선(唐詩選)』, 『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 『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 『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이 있다. 글씨를 잘 썼고, 그림에도 능하여 절지(折枝 : 꽃가지나 나뭇가지만 그리고 뿌리는 그리지 아니하는 화법)를 잘 그렸다.

 

1612년(44세)에 건립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海印寺四溟大師石藏碑)(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소재)의 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