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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정월 대보름 관련 한시. 추재 조수삼 상원죽지사 세시풍속 5수(秋齋 趙秀三 上元竹枝詞 歲時風俗 5首 紙鳶, 聽鐘, 踏橋, 石戰, 讓金洪李)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일 년을 주기로 하여, 음력 정월부터 섣달까지 해마다 같은 시기에 반복해서 전승해 왔던 의례나 풍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시의례(歲時儀禮)라고도 한다.
전통사회에 있어 우리 민족은 농경을 주 생업으로 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세시풍속은 대다수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대표적인 행사인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을 상원(上元)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전국 곳곳에서는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갖가지 민속놀이와 풍속을 즐겼다.
대표적인 행사로 마을 제사 지내기, 달맞이 소원 빌기, 더위팔기, 다리밟기,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줄다리기 등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보름달을 신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숭배하였다. 특히 그 해의 첫 번째 만월(滿月)이 되는 대보름에는 일 년의 운수를 점치고 농사의 풍년과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 보름 하루전에는 보름밥 얻어먹기나 훔쳐먹기, 식구 불 켜기, 밤새기를 하며, 보름날 당일에는 용알뜨기(보름날 새벽 우물에서 부녀자들이 닭이 울 때 먼저 용알(물)을 떠오는 풍속), 더위 팔기, 어(魚)부슴, 보름달보기, 콩 점치기, 등을 한다. 마지막 16일에는 달기귀신(女+旦己 : 독부(毒婦)로 유명한 은(殷) 나라 주왕의 비(妃 : 달기)가 훗날 주(周) 나라 무왕(武王)에게 죽임을 당한 후 정월 16일이면 집집마다 찾아 오다는 귀신) 쫓기 등을 한다.

소싯적 시골에서 일년 중 가장 큰 동내 행사로 집집마다 부엌을 열어놓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으면 돌아가며 보름밥을 얻어먹었고, 어린 아이들은 옆 동내아이들과 논에서 벼 밑둥을 뽑아 던지는 투석전, 쥐불놀이를 하며 가장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일부 마을에만 명맥을 유지하는 행사가 되고 있어 아쉽다.
소개하고자 하는 추재 조수삼(秋齋 趙秀三)의 세시기(歲時記)에 보름날은 “생화소리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술과 음식이 즐비하니, 대개 일년 중에 제일의 명절(名節)로 여긴다.”(笙歌絡繹 酒食若流 盖一年中第一名節)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50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큰 명절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점 점 잊혀져 가는 보름날 세시풍속 관련 추재선생의 시 4수와 함께 민족의 미풍양속을 통해 이웃 간 우애를 다지고자 했던 시 한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 : 정월보름) *죽지사(竹枝詞 : 는 중국 악부 죽지사를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경치·인정·풍속 따위를 노래한 가사)

지연(紙鳶 : 종이연)

黃絲白線細相同(황사백선세상동) 노란 실과 흰 실이 어울려 서로 마주보며
竟日惟爭上下風(경일유쟁상하풍) 상하로 부는 바람에 하루 종일 다투네
寒嘯一聲何處起(한소일성하처기) 찬 바람소리 어디서 일어나는 가?
萬人擡首碧霄中(만인대수벽소중) 모두가 머리 들어 푸른 하늘 쳐다보네

청종(聽鐘 : 종소리 듣기)

十字街東百尺樓(심자가동백척루) 십자거리 동쪽 백 척이나 되는 높은 누각에
滿城車馬盡回頭(산성차마진회두) 온 성안에 수레와 말들이 모두 머리를 돌리네
二八雷車空外響(이팔뇌거공외향) 28번 치는 우레와 같은 종소리 하늘 너머 울려 퍼지니
暗塵如雨月中浮(암진여우월중부) 어두운 티끌이 비가 내리 듯 달빛 속에 떠다니네

답교(踏橋 : 다리밟기)

橋上遊人立萬重(교상유인입만중) 다리 위 노니는 사람이 만 겹이나 서 있는데
橋邊春水月溶溶(교번춘수월용용) 다리아래 봄물에는 달빛 밝게 떠있네
行歌兩岸遙上答(행가양안요상답) 양 언덕에서 서로 노래 부르며 화답하는데
滿地梅花五夜風(만지매화오야풍) 땅 위 가득 핀 매화는 새벽바람에 흔들리네

석전(石戰 : 돌 싸움)

城北城南惡少群(성북성남오소군) 성북고 성남의 젊은이들 서로 무리 지어
當場飛石雨紛紛(당장비석우분분) 마주 보며 던지는 돌이 비처럼 흩날리네
撤棚毁瓦渾無惜(철붕훼와혼무석) 울타리 뜯기고 기와 깨지는 게 아까울 게 없다마는
莫使吾隣致大奔(막사오린치대분) 우리 편이 크게 밀려 달아나지 않았으면…

양금홍이(讓金洪李 : 돈을 양보하는 홍 씨와 이 씨)

洪家何管李金傳(홍가하관이금전) 홍씨네 집이 어찌 이씨네 돈을 가지랴.
辭者賢如讓者賢(사자현여양자현) 가져가라는 자도 어질지만 사양하는 자도 어지네.
聖世旌褒敦薄俗(성세정포돈박속) 임금께서 상을 내려 옅은 풍속을 두텁게 하니
鄰邦幾處息爭田(인방기처식쟁전) 이웃 여러 곳에서도 밭 다투기를 그쳤다네.

추재 조수삼(秋齋 趙秀三 1762~1849)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經畹)이다. 본은 한양(漢陽)으로,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원문(元文)의 아들이고, 조선 말기의 화원(畵員)인 중묵(重黙)은 그의 손자이다.
훌륭한 풍채에 신선의 기상을 갖추었던 여항시인(閭巷詩人) 조수삼은 6. 7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외우고 자집(子集)을 읽으며 글짓기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문필력은 부친의 각별한 자식 교육에 기인한 것으로, 부친은 일찍이 그의 교육을 위해서 서적 구입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방에 드나드는 선생 어른들의 이야기와, 술잔을 나누고 시를 창화(唱和 : 한쪽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다른 쪽에서 그에 이어서 외치거나 부름)했던 것을 듣고 보면서 자랐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시문 등 문필에 뛰어났지만, 중인 신분의 한계로 사대부 관료 밑에서 문장을 작성하는 실무직에 종사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남관찰사로 있던 조인영(趙寅永)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지낸 것을 비롯하여 서리(書吏), 서기(書記), 참군(參軍), 종사(從事)와 같은 하급 직무에 종사하였다. 그가 83세였던 1844년(헌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수삼전」에 나타나 있듯이, 시문뿐만 아니라, 과거문[功令], 의학(醫學), 장기와 바둑[奕棊], 글씨[字墨], 거문고 등 여러 방면의 재주가 뛰어나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훤칠한 생김새에 입담이 좋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문인들과 두루 교류하였다. 그는 정이조(丁彛祚)․이단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黙)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고,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들과도 친밀히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인물로서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그가 8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이를 축하해 주는 고관대작이 수십 인에 이를 정도였다.
그는 참모로서의 실무 경험과 함께, 이와 관련하여 전국 각지로 여행하면서 다양한 견문을 넓혔다. 1789년(정조 13) 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다녀온 이래로 여섯 번이나 연행(燕行 : 중국 북경 행차)을 하였는데, 이때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유희해(劉喜海)․강련(江漣)․주문한(朱文翰) 등과도 교류하였다. 「조수삼전」에서 “여섯 차례나 중국에 건너가서 사해 사람들과 많이 사귀었으니, 그 시파(詩派)는 단지 압록강 동쪽에 있을 뿐만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나, “그가 처음에 중국에 갈 때에 길에서 강남 사람을 만나 같이 수레를 타고 가면서 중국말을 다 배웠으며, 북경에 들어가니 중국 사람들과 말하는데, 필담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사람과 대단히 친하게 되었는데, 그런지 몇 해 만에 그 사람이 죽고 그 아들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만주 벌판에서 그 아들을 만나서 옛날 일을 생각하고 주머니를 있는 대로 다 털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빨리 중국어를 습득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의 당대 문사들과 쉽게 교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각지를 여행하고 6차례의 외국 여행 경험을 통해서, 그는 백성들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세시기(歲時記)와 기속시(紀俗詩)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세시기」의 서문에 “그 앞 시대의 옛날 풍속을 더하여 기록하고 모두 남기어 두는 것은 고금의 성쇠 차이와 제나라와 노나라가 한 번에 변한 차이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니, 존양(存羊 : 실속없는 허례나 구례를 버리지 않고 그냥 둠)의 애(愛)를 두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더욱 풍부한 견문을 쌓았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항상 머리에 기억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추재집(秋齋集. 총 8권 4책)에는 총 2,700수에 달하는 조수삼의 작품이 전하는데, 그 대부분은 여행하면서 느낀 감회 등을 적은 시(詩)이다. 그중에 기속시(紀俗詩)와 관련된 것은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일본잡영(日本雜詠)」, 「고려궁사(高麗宮詞)」,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 「북행백절(北行百絶)」, 「차경직도운사십육수(次耕織圖韻四十六首)」, 「기이(紀異)」 등이다. 외국의 풍속을 읊은 것은 「외이죽지사」(121수, 1795년 작)와 「일본잡영」(14수)이며, 「고려궁사」(22수)는 고려시대의 궁중 풍속을 읊은 시이다. 그리고 「상원중지사」(15수, 1801년 작)는 조수삼 당대의 서울 시정의 대보름 풍속을 읊은 것이며, 「북행백절」(100수, 1823년 작)은 관북 지방을 여행하면서 백성의 풍속과 생활상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차경직도운」(46수)은 농촌에서 달에 따라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을 노래한 것이며, 「기이」(조수삼의 만년 작)는 서울 시정의 인정세태를 노래한 것이다. 이밖에 조수삼의 작품에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구도올(西寇檮杌)」과 「석고가(石鼓歌)」․「억석행(憶昔行)」․「병치행(病齒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