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추수 관련 한시 2수(동주 이민구 확도, 무명자 윤기 영전가확도 : 東州 李敏求 穫稻, 無名子 尹愭 詠田家穫稻)

오래전 흑백사진 공모전에 수상한 사진이 기억에 떠오르는데 수상작은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농부가 볏짚을 무의식적으로  쌓은 풍경을 안개 낀 새벽에 담은 사진이었다. 낫으로 벼를 베고 적당한 크기로 묶어 ‘ㅅ’ 자 형태로 쌓은 모습을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첨단 농기계로 한 사람이 약 1만평에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 하니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벼 수확이 한창인 지금의 추수방식은 콤바인으로 벼를 수확한 다음 바로 탈곡기에서 낱알을 분리한 후 볏짚은 레이키라는 기계를 이용하여 모아주고 베일러가 원형으로 말고 랩핑기가 흰 비닐로 랩핑 하게 되면 넓은 들판에는 드문드문 크고 둥그란 모습만 남게 된다.

도심에서 조금만 야외로 나서면 황금들녘으로 넘실거리는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올해는 벼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큰 태풍도 없었고 비도 자주 내려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없어 풍년이 예상된다.

4~50년 전 벼를 수확하는 모습은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추수관련 동주(東州), 무명자(無名子) 선생이 남긴 시를 살펴보며 수확의 즐거움과 애환을 느껴보고자 예서와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확도(穫稻 : 벼를 수확하다)  -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納稼山村僻(납가산촌벽) 수확하느라 산골마을 후미진 곳에

牛車日在門(오거일재문) 소달구지가 날마다 들락거리네.

兒童競收穫(아동경수확) 아이들 다투어 이삭을 줍고

鳥雀滿田園(조작만전원) 참새들 들판에 가득하네.

地迮場功少(지책장공소) 땅이 좁아서 소출은 적은데

時艱井稅繁(시간정세번) 시절 어려워서 세금은 많구나

西隣有酒伴(서린유주반) 서쪽 이웃에 술친구 있어

餘粒具淸尊(여립구청존) 남은 쌀로 맑은술을 마련한다네.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는 조선시대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州)·관해(觀海)이다. 신당부수(神堂副守) 이정(李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검(李希儉)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며, 어머니는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해 수찬(修撰 :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던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병조좌랑을 거쳐 1622년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 해 선위사(宣慰使 : 조선시대 여러 나라의 사신(使臣)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였다.

교리(校理 :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에 둔 정오품(正五品) 관직)·응교(應敎 :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에 두었던 정사품(正四品) 관직)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6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 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해 배편을 준비했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아산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그 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했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한다. 저서로는 『동주집(東州集)』·『독사수필(讀史隨筆)』·『간언귀감(諫言龜鑑)』·『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남아있다.

 

영전가확도(詠田家穫稻  : 농가의 벼 수확을 노래하다)  -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農家秋事急(농가추사급) 농가에서 가을걷이 급히 서둘러

刈穫不違時(예확부위시) 벼 베는 시기를 놓치지 않네.

稚子爭先走(추자쟁선주) 어린아이들은 앞 다투어서 달리고

厨妻趁午炊(주처진오취) 아낙은 때맞추어 점심밥 짓네.

揮鎌歌俗調(휘겸가속조) 낫질하며 노래를 부르고

驅犢護新菑(구독호신치) 송아지를 몰아내고 새로 간 밭을 지킨다.

大有逢今歲(대유봉금세) 올해는 큰 풍년 만나게 되었으니

渾忘昔日飢(혼망석일기) 지난날의 굶주림 까맣게 잊었네.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광보(尹光普)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원일서(元一瑞)의 딸이다. 이익(李瀷)을 사사(師事)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여 년 간 학문을 연구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초사(初仕 : 과거에 급제한 뒤 천거되어 처음으로 하는 벼슬)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예조·병조·이조의 낭관(郎官 : 조선시대 정 5품 통덕랑 이하의 당하관을 통틀어 이르던 말)으로 있다가 남포현감(藍浦縣監)·황산찰방(黃山察訪)을 역임하였다.

이후 다시 중앙에 와서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관을 역임하였다. 벼슬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無名子集) 20권 20 책이 있다.

 

(주변 들판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