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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인악 의첨 폐강(仁嶽 義沾 廢講)

가끔 한가함이 다가오거나 여유가 있을 때 관광 명소를 찾는데 그 곳에는 전통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사찰의 천정 빛바랜 단청(丹靑)에 시선이 머물곤 했는데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을 기본으로 색을 배색하여 간색(間色)을 만들어 여러 가지 색을 표현하여 사찰 건물의 천정을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선원(禪院), 강원(講院)이 자리잡고 있다. 선원은 선(禪)을 교육하고 실수(實修)하는 불교의 전문교육기관이고 강원은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불전(佛典)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이다.

강원(講院)에서 강주(講主)는 교육 전반을 관장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승려를 말하며, 강백(講伯)은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강사(講師)에 대한 존칭이다.

소개하고자 하는 선시(禪詩)는 조선 후기 당시 사람들은 교학(敎學)의 양대 산맥으로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영남에는 인악 의첨(仁嶽義沾)을 꼽았는데 대강백(大講伯)이신 인악의첨 스님의 폐강 선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힘들었던 오랜 경론(經論) 강의를 종료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해 뜰 무렵 소나무 아래서 청산을 대하며 읊었으리라.

 

폐강(廢講 : 강의를 마치고)

千山曙色赴晨鐘(천산서색부신종) 온 산에 해 뜰 무렵 새벽종 울리니

浮響冷冷在半松(부향냉랭재반송) 그 소리 냉랭히 소나무에 걸리네

不復朋徒來講法(불복붕도래강법) 배우고 가르치는 것 모두 걷어버리고

終朝無語對靑山(종조무어대청산) 말없이 청산과 마주하여 진종일 앉아 있네.

 

인악 의첨(仁嶽 義沾, 1746~1796)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 교학의 대강백(大講伯)이다. 의첨 스님의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성산(星山), 이름은 의선(義宣)ㆍ의소(義沼), 자는 자의(子宜), 법호는 인악(仁嶽)이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 세손이며 아버지는 휘징(徽澄)이고 어머니는 달성(達成) 서씨(徐氏)이다. 1746년(영조 22)에 달성 인흥촌(현 경북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고려 때 유명한 인흥사(仁興寺)가 있던 곳)에서 태어났다.

8살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세 번 읽고 다 외워버리니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근 고을까지 났다. 15세에 시경, 서경, 역경을 다 읽고, 글을 잘 지어 천재라 했다. 18세에 용연사(龍淵寺)의 가선 헌공(嘉善軒公) 문하로 출가하여, 벽봉(碧峰) 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교학을 배웠다.

그 후 서악(西岳), 홍유(泓宥), 농암(聾巖) 등 여러 선지식에게 수학하였다. 1768년(영조 44) 벽봉 스님에게 돌아와 법을 이어받고 강당을 열어 설법하였다. 뒤에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화엄(華嚴)의 대종사(大宗師)인 운파 상언(雲坡尙彦) 스님에게서 화엄경과 선문(禪門)을 배웠다. 비슬산, 팔공산, 계룡산, 불영산 등의 산을 유력하며 경전을 강의했으며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 용주사를 창건할 때, 의첨 스님은 증사(證師 : 법회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 )가 되어 불복장원문경찬소(佛服藏願文慶讚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으니 정조가 그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교학의 양대 산맥으로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영남에는 인악 의첨을 꼽았다.

1796년(정조 20)에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수(世壽) 51세, 법랍( 法臘) 34세였다. 제자들이 다비식을 행하고 동화사와 용연사에 영당(影堂)을 세웠다. 12년이 지난 1808년에 제자들이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을 동화사에 세워 지금까지 전한다.

저서로는 인악집(仁嶽集), 화엄사기(華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