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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최호 황학루(崔顥 黃鶴樓)

성당(盛唐)의 시인 최호(崔顥 704? ~ 754)가 쓴 유명한 시 황학루(黃鶴樓)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호는 10대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할 만큼 총명했으나 호방한 기질로 인하여 관직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홀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천하를 20년간 주유(周遊)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중년에는 웅장하고 거침없는 풍격으로 시를 써 내려갔는데 황학루는 그 절정기에 쓴 시로 황학루 관련 400여편의 시중 중국인들로 부터  최고의 찬사와 함께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중국의 대표적 3대 누각(樓閣)은 웨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난창(南昌)의 등왕각(藤王閣)이다.

 

黃鶴樓(황학루)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버려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곳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 번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 그대로 유유히 떠도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맑은 강에는 한양의 숲 또렷하게 비치고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앵무주에는 향긋한 풀만 무성하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인가

烟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안개 낀 장강 언덕에서 시름겨워 하노라

 

* 앵무주 : 유적명으로 위치는 호북성 무한시(武漢市) 무창성(武昌城) 밖 장강 가운데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조의 장자 황역(黃射)이 이 섬(洲)에서 빈객들을 모아놓고 큰 연회를 열 때 예형이 즉석에서 붓을 들어 절세의 명편인 앵무부(鸚鵡賦)를 짓는다" 하여 이로부터 얻어진 지명이다. 후에 예형은 죽어 이곳에 매장되나, 이 섬은 명대 말에 수몰되고 말았다. 이외에 한양(漢陽)의 제방 밖에 앵무주가 하나 더 있는데, 이는 청대 건륭(乾隆) 연간에 새로이 모래가 퇴적되어 형성된 섬이다. 원래 이름은 보득주(補得洲)였으나, 가경(嘉慶) 연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칠언율시는 7자로 해서 8구로 된 한시 형식이다. 3~6세기 중국 강남의 육조부터 격률(格律)이 엄격하고 규칙이 엄정한 율시(律詩)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대 초기에는 오언율시가 먼저 성행했으나, 칠언율시가 곧 대세를 이뤘다. 보통 3~4구와 5~6구가 대구(對句)되는데, 황학루는 그 구조를 완벽히 보여준다. 훗날 남송(南宋)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엄우(嚴羽)는 “당대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가 제일이다(唐人七言律詩當以崔顥黃鶴樓爲第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최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백(李白)도 뒤늦게 황학루를 찾았다가 누대에서 최호가 남긴 시를 읽은 이백은 “참으로 절묘하구나”라고 탄식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 이야기에 감복한 후세인들은 황학루 동쪽에 정자 ‘각필정(擱筆亭)’을 세웠다. 각필은 붓을 놓았다는 뜻이다. 훗날 이백은 앞서 소개한 황학루에서 광릉(오늘날의 양저우·揚州)으로 가는 맹호연을 떠나보내다(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를 남겨 아쉬움을 달랬다.

또한, 청나라의 시인 심덕잠(沈德潛)은 위 시를 두고 ‘천고의 기재(奇才)를 떨쳤다(擅千古之奇)’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