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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초려 이유태 약산동대(草廬 李惟泰 藥山東臺)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1607∼168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시호는 문헌(文憲)이시다.
유일(遺逸 : 조선 초기에 만든 제도로, 초야에 묻힌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로 천거를 받아 인조 때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내고 1660년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663년 균전사(均田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내고 효종 즉위 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했다. 3사(司)가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자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려 김상헌의 충의도덕(忠義道德)을 높이 찬양하여 그 처벌을 극력 반대했다. 1675년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윤휴(尹鑴) 등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 5년 뒤에 풀려났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처음에는 송시열과 의견을 같이 했으나 뒤에는 학문상 의견의 대립으로 절교했다.

치국경제 문제에서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실시 및 양전(量田)의 시행, 사창(社倉)의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이조판서가 추증,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초려집(草廬集) 26권이 전한다.

본래 한미(寒微)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사림(湖西士林)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했으며, 특히 치국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소개하고자 하는 시는 그가 만년에 약산 동대에 홀로 올라 주변 경관과 유유히 흐르는 강과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크게 한번 웃고 파란만장 했던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읊은 시를 예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藥山東臺(약산동대 : 약산의 동대에서)

藥石千年在(약석천년재) 약산의 바위는 천년 동안 변함없고

晴江萬里長(청강만리장) 맑은 강은 만리 길 흘러간다

出門一大笑(출문일대소) 문을 나와 크게 한번 웃어보고

獨立倚斜陽(독립의사양) 홀로 서서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