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청허 휴정(淸虛 休靜 : 西山大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자는 묵계(默契)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과 함께 의승장(義僧將)으로 3년 동안 참전하였다. 그 후 전북 부안군 변산 월명사(月明寺)에서 수도하다가 지리산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갔다. 1617년(광해군 9)에는 왕명을 받아 정심(正心)ㆍ지엄(智嚴)ㆍ영관(靈觀)ㆍ휴정(休靜)ㆍ선수(善修) 등 5대 종사(宗師)의 영정을 그려 조사당에 모시고 제문을 지었다. 76세로 입적하자 제자들이 지리산 천왕봉(天王峯) 밑에 영당(影堂)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가 임진왜란을 치른 후 지리산의 여러 수행처에서 ‘청매문파(靑梅門派)’를 열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선교(禪敎)와 유교, 그리고 도교에도 해박한 학식을 지녔던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조사의 공안법문을 노래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 : 깨어있되 번뇌가 없는 상태)한 수행과 깨달음을 노래한 청매집(靑梅集)을 남겼다.
청매집은 그가 지은 시가(詩歌)와 산문을 엮어 1633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33년(인조 11)에 지리산 영원암에서 간행된 목판본과 1900년대 권상로(權相老)가 전사(傳寫)한 필사본(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전한다. 1631년 권두에 이정구(李廷龜)의 서문과 기재(寄齋)가 쓴 발문, 1633년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에서 제자 쌍운(雙運)이 쓴 후발(後跋)이 있다.
상권에는 소림단비(小林斷臂)·삼조풍양(三祖風恙)·사조해탈(四祖解脫)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달마대사(達磨大師) 이래 역대조사의 행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들과 전등록(傳燈錄)·벽암록(碧巖錄) 등에 제시되어 있는 화두(話頭)의 문답이나 특수한 과제 140여 개를 칠언절구의 게송(偈頌)으로 엮은 것이다. 이들 게송은 송나라 선승 설두(雪竇)의 송고백칙(頌古百則), 원오(圓悟)의 벽암록 등과 같이 선지(禪旨) 종풍(宗風)을 찬송한 것으로, 조선시대 승려의 통상적인 시와는 유형이 다른 희귀한 작품이며, 송고백칙·벽암록과 함께 귀중한 선문학(禪文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권에는 일반적인 술회(述懷)·영물(詠物)·선지·교계(敎誡) 등 오언과 칠언의 절구(絶句)와 율시 200 여수를 비롯하여 고시(古詩), 산수기행, 송운대사(松雲大師 : 사명당)를 추천(追薦)하는 소(疏), 각종 서신,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위한 제문과 송운대사를 위한 제문, 지마론(指馬論)·십무익송(十無益頌) 등의 잡저(雜著)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잡저 10여 편은 모두 중요한 불교 사료가 되고 있으며, 이 중 십무익송은 특히 유명하다.
이러한 시편들은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임을 인식하고, 지관(止觀 : 망령된 생각을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지혜로 만법을 비추어 보는 일)수행을 통해 자성(自性)을 찾고자 한 청매선사의 올곧은 수행 삶의 흔적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청매선사의 출가와 구도, 깨달음과 자연 교감, 조사공안 법문과 수행자들에 대한 경책과 교화, 그리고 임진왜란과 관련한 시편들을 통해 그의 선심이 어떻게 시문학에 투영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그가 남긴 선시 몇 수를 자서해 보았다.
소림단비(少林斷臂 : 少林에서 팔을 끊음)
一揮霜刃斬春風(일휘상인참춘풍) 서릿발 같은 칼날 휘둘러 봄바람 베어냄에
雪滿空庭落葉紅(설만공정낙엽홍) 흰 눈 쌓인 빈 뜰에 붉은 잎 지고 있네
這裏是非才辨了(저리시비재변료) 이 속의 시비를 겨우 분별하고 나니
半輪寒月枕西峰(반륜한월침서봉) 차가운 반달 서쪽 봉우리에 걸려 있네
*달마를 찾아간 혜가(慧可 : 남북조시대의 승려로 禪宗 第2祖)가 소림 굴 밖 눈 속에 서서 팔을 끊어 신표(信標)를 보였다는 소림단비(少林斷臂)의 설화를 두고 청매선사가 지은 시
장사완월(長沙翫月 : 장사선사의 달맞이)
驀直呈才誰勝負(맥직정재수승부) 느닷없이 내려치니 누가 승부를 내겠는가
生花雪月作陽春(생화설월작양춘) 흰 꽃 위에 눈의 달빛, 지금은 봄이 한창이네
風流纔罷月欲落(풍류재파월욕낙) 풍류는 끝나고 달은 기울여하는데
自有遠鷄來報晨(자유원계래보신) 먼 마을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리네
향엄격죽(香嚴擊竹) : 중국 당나라 때 향엄이 마당을 쓸다가 돌멩이가 튕기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음
龍吟枯木猶生喜(용음고목유생희) 용이 고목에서 우니 오히려 환희가 솟아나고
髑髏生光識轉幽(촉루생광식전유) 해골에서 광채가 빛나니 알음알이 깊어지네
磊落一聲空粉碎(뇌락일성공분쇄) 한 자락 벼락같은 큰 소리는 허공을 부수고
月波千里放孤舟(월파천리방고주) 달빛 파도치는 천 리에 홀로 배 띄우네
심추(深秋)
有物無手足(유물무수족)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어느 물건이
驅空入小樓(구공입소루) 허공 몰아 작은 다락으로 들어왔다
風鈴驚午夢(풍령경오몽) 풍경 소리에 놀라 낮잠에서 깨보니
山色已深秋(산색이심추) 산 빛은 이미 깊은 가을이구나
증의천선자(贈義天禪子 : 의천(義天) 선자에게)
看經非實悟(간경비실오) 경전을 보는 것 진실한 깨달음 아니요
守默也徒勞(수묵야도로) 침묵을 지키는 것 또한 헛되이 수고함이네
秋天淡如海(추천담여해) 가을하늘의 맑기가 바다와 같다면
須是月輪孤(수시월륜고) 반드시 이곳 둥그런 마음의 달 홀로 뜨리오
할(喝)
磊落寒聲白日昏(뇌락한성백일혼) 벼락같은 차가운 소리에 밝은 해가 어두워지고
針鋒頭上弄乾坤(침봉두상농건곤) 바늘 끝에서 하늘과 땅을 희롱하네
拈花微笑家初喪(염화미소가초상) *염화미소(拈花微笑)조차도 초상난 집안인데
更把虛空作兩分(갱파허공작양분) 다시 허공을 잡아 두 조각내어 버렸네
*(염화미소 :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
무주대(無住臺 : 머무름 없는 대)
般柴運水野情慵(반시운수야정용) 땔나무 해오고 물 길는 일 외엔 하는 일 없네
參究玄關性自空(참구현관성자공) 나를 찾아 현묘한 도리 참구에 힘쓸 뿐
日就萬年松下坐(일취만년송하좌) 날마다 변함없이 소나무 밑에 앉았노라면
到東天日掛西峯(도동천일괘서봉) 동녘 하늘의 아침 해가 어느덧 서산에 걸려 있네
십종무익송(十種無益頌 : 수행을 함에 무익한 열 가지)
1.心不返照 看經無益(심불반조 간경무익)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
2.不達性空 坐禪無益(부달성공 좌선무익) 성품이 공함을 사무쳐 알지 못하면 좌선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3.不信正法 苦行無益(불신정법 고행무익) 정법을 믿지 아니하면 고행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4.不折我慢 學法無益(부절아만 학법무익) 자신의 교만함을 꺾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5.欠人師德 濟衆無益(흠인사덕 제중무익) 다른 사람들의 스승 노릇할 덕이 없으면 대중들을 거느려도 이익이 없다.
6.內無實德 外儀無益(내무실덕 외의무익)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외의(겉으로 드러나는 위세)를 세워도 이익이 없다.
7.心非信實 巧言無益(심비신실 교언무익) 마음이 진실하지 아니하면 말을 잘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8.輕因重果 求道無益(경인중과 구도무익) 원인을 가벼이 여기고 결과를 중히 여기면 도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
9.滿腹無識 驕慢無益(만복무식 교만무익) 뱃속에 무식만 가득하면 교만하여 이익이 없다.
10.一生乖角 處衆無益(일생괴각 처중무익) 일생 동안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면 대중과 함께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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