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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육유와 당완 채두봉(陸游와 唐琬 釵頭鳳)

중국 소흥심원(紹興沈園)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紹興市)의 무롄교(木蓮橋) 양허룽(洋河弄)에 있는 정원으로 남송(南宋) 시대에 건립되었다. 소유주가 심씨(沈氏)라 하여 심원(沈園)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陸游)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이 정원은 육유와 당완(唐)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곳으로 담벽에 채두봉(釵頭鳳)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육유(陸游)는 스무 살이던 1144년에 예쁘고도 지혜로운 고종사촌 동생인 당완(唐琬)과 혼인을 하는데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라 금슬이 좋아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에는 고종사촌간 결혼은 금기가 아니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인지 육유의 어머니가 금슬이 유독이 좋은 아들 부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당완(唐琬)이 밖으로 나다니며 남자들과 학문을 한다는 것이 맘에 들지 않던 차에 육유가 과거에 떨어지자 당완이 남편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못했다며 구박을 했다.

 

육유 어머니의 며느리 구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당완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는 매일 며느리를 괴롭힌다.

 

그리고 끝내는 휴처(休妻 : 별거)를 하고 후처를 들이도록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유와 당완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갔다.

 

육유는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지만 어머니 마음은 돌아설 줄 모르고 사랑과 효도 사이에서 고민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육유는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당완(唐琬)과 이혼을 했지만 그녀를 잊을 수 없어 당완을 이웃 마을에 숨겨놓고 찾아가 부부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안한 외줄타기 사랑은 곧 어머니에게 들키고 육유의 어머니는 당완에게 달려가서 당완을 멀리 쫓아 버려 두 사람은 다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육유는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정해준 왕(王)씨 성을 가진 여자와 재혼을 하였고 소식을 들은 당완도 친정 부모의 뜻에 따라서 조사정(趙士程)이라는 이종 사촌동생에게 개가를 하게 된다.

 

조사정(趙士程)은 송(宋)나라 황실의 종친으로 아이를 낳지 못해 휴처(休妻)를 당한 당완을 정실로 맞이하게된다.

 

이후 육유는 객지를 떠돌다 8년 만에 고향의 심원(沈園)으로 바람을 쐬러 갔는데 이곳은 돈 많은 지방 벼슬아치인 심(沈)씨가문의 정원으로 경치가 워낙 뛰어난 유원지였다.

 

마침 당완도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나왔고 당완을 알아본 육유는 울다시피 하며 시 한 수를 담벼락에 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채두봉(釵頭鳳) 시이다.

 

이후 정실이 된 후에도 당완은 10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심원의 채두봉 이후 우울증으로 사망하자 조사정은 죽을 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조사정은 몇 년 후 군대를 이끌다 적군의 습격을 받아 순국을 하게 된다.

 

사(詞)의 제목인 ‘채두봉(釵頭鳳)’은 송대 무명작가의 힐방사(擷芳詞)의 한 구절(句節)인 가련고사채두봉(可憐孤似釵頭鳳 : 가엾고 외롭구나, 비녀 끝에 새겨진 봉황 한 마리처럼)을 인용하였다.

 

채두봉(釵頭鳳)  - 육유(陸游)

紅酬手 黃藤酒(홍수수 황등주) 붉고 보드라운 손이 보내온 잘 익은 황등주

滿城春色宮牆柳(만성춘색궁장류) 성에는 봄색이 완연하고 궁궐 담장엔 버들잎 너울거리네

東風惡 歡情薄(동풍오 환정박) 사나운 동풍에 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一懷愁緖 幾年離索(일히수서 기년이색) 수심에 젖은 후 헤어진 지 그 몇 해였던가?

錯 錯 錯!(착 착 착) 아! 착잡하고 착잡하고 착잡하도다.

春如舊 人空瘦(춘여구 인공수) 봄은 예나 지금이나 의구하지만 사람만 공연히 야위어

淚痕紅浥鮫綃透(누흔홍읍교초투) 연지 바른 얼굴에 흐르는 눈물 자욱만 손수건에 붉게 적시네

桃花落 閑池閣(도화락 한지각) 도화 꽃 떨어지고, 연못가의 누각 또한 한가로운데

山盟雖在 錦書難託(산맹수재 금서난탁) 옛 맹세 여전한들 비단 글에 써 전하기 어려우니

莫 莫 莫!(막 막 막) 아, 막막하고 막막하고 막막하도다.

 

그리고 얼마 후 당완도 그곳을 찾아 옛 남편인 육유가 자신을 못 잊어하는 시를 보고는 자신의 아픈 감정을 드러내어 같은 제목의 시로서 답을 합니다.

 

채두봉(釵頭鳳)   - 당완(唐)

世情薄 人情惡(세정박 인정오) 세상의 마음은 옅다던데 그 사람 마음은 모질구나

雨送黃昏花易落(우송황혼화이락) 황혼에 비를 보내니 꽃 지기가 더욱 쉬워라

曉風幹 淚痕殘(효풍간 누흔잔) 새벽바람이 메마른데도 눈물자국 남아있어

慾箋心事 獨語斜欄(욕천심사 독어료난) 마음을 부치고 싶어 난간에 기대어 홀로 말하네

難 難 難!(난 난 난) 아~ 어렵구나, 어렵구나, 어렵구나!

 

人成各 今非昨(인성각 금비작) 그대와 나 제각기 가정 이루어 지금은 옛날과 다르네

病魂常似秋千索(병혼상사추천삭) 오랫동안 병든 영혼 천년세월 찾아 헤매는 듯

角聲寒 夜欄珊(각성한 야란산) 호각소리 차갑게 들리는 밤에 난간에 홀로 서 있자니

怕人尋問 嚥淚裝歡(파인심문 연루장환) 남이 그 사연 물어볼까 두려워 눈물 삼키며 일부러 웃음 짓는다

瞞 瞞 瞞!(만 만 만) 아~ 감추고, 감추고, 감춥니다!

 

당완(唐琬)은 이 시를 써서 자신의 심정을 옛 남편에게 알린 후 우울증이 심해져 시름시름 앓다 얼마 후 세상을 버리고야 말았다.

 

육유(陸游)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68세의 노인이 되어 심원을 찾아서 다시 시 한수를 첨가합니다.

 

楓葉初丹槲葉黃(풍엽초단곡엽황) 단풍잎이 처음 붉어질 때 떡갈나무 잎도 노랗네

河陽愁鬢怯新霜(하양수빈겁신상) 강물에 어린 햇빛이 수심 어린 흰머리에 새서리를 엊을 까 겁나네

林亭感舊空回首(임정감구공회수) 숲 속의 연못 정자에서 추억이 떠올라 괜히 고개 돌리니

泉路憑誰說斷腸(천로빙수설단장) 샘터 가는 길을 핑계로 누구에게 사랑의 괴로움을 말하리

壞壁醉題塵漠漠(괴벽취제진막막) 흙벽의 비뚤 한 글씨는 진흙에 허물어지고

斷雲幽夢事茫茫(단운유몽사망망) 갈라진 구름을 떠도는 흐릿한 꿈은 머나먼 일이 되었네

年來妄念消除盡(연내망념소제진) 몇 년이면 몹쓸 생각은 다 지워지리

回首禪龕一炷香(회수선감일주향) 물가의 감실 쪽에 돌아서 한 줄기 향을 피우네

 

육유(陸游)는 그 후 75세가 되던 해가 되어 다시 심원을 찾는데 젊은 시절 너무 사랑했던 아내 당완(唐琬)의 흔적을 더듬던 육유는 비통했다.

서글픈 마음으로 그녀와의 옛 추억을 회상하다 마음이 아파진 그는 심원 2수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육유는 82세에 이곳을 다시 찾았고 2년 후 육유도 멀리 떠난 당완을 찾아서 먼 길을 나서게 되는데 그의 마지막 시도 당완을 생각하는 시다.

 

也信美人終作土(야신미인종작토) 믿노니, 아름다운 사람도 끝내 흙이 되는 것

不堪幽夢太悤悤(부감유몽태총총) 너무나 짧디 짧게 가버렸기에 그리운 마음을 견디기 어려웠노라

 

위 내용은 문역뜰이 작성한 애절한 사랑의 시 채두봉을 남긴, 육유(陸游)와 당완(唐琬)의 내용을 참고하였음.

 

*육유(陸游 1125 ~ 1210)는 중국 남송(南宋)의 대표적 시인으로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며 산음(山陰:浙江省)에서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로 출생했다. 부친은 육재(陸宰)이며 병참보급을 담당하는 관리를 지냈다. 부친이 군사(軍事) 일을 맡았지만 문(文)에도 밝아 집에는 많은 서적을 보유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북송(北宋)이 금(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게 멸망하여 정강(靖康)의 변을 겪고 있었고 그의 가족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침략자 금(金) 나라에 대하여 철저한 항전 주의자로 일관하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였으며, 주화파(主和派)를 경멸했다. 당시 남송 고종은 재상 진회(秦檜)와 함께 금과 화친을 목적으로 하였고 명장 악비(岳飛)까지 독살했다. 육유는 악비의 죽음을 한탄하며 애국충정에 찬 시(詩)를 남겼다. 육유는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하였다가 쇄청시(鎖廳試)에 급제하였지만 진회의 방해로 결국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 고향 산음(山陰 : 현재의 紹興)으로 돌아가 시작(詩作)에 몰두하였고 병서(兵書)를 가까이하며 검술 연마에 힘썼다. 34세에 복주(福州)에서 첫 지방관리가 되었으며 여러 지방의 지방관을 지냈다. 1162년 중앙으로 복직하여 추밀원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봉직했다. 남송 효종이 즉위하고 육유는 진강(鎭江)의 통판으로 임명되어 금(金)을 치고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하지만 북벌론이 실패하고 주화파(主和派)가 득세하자 그도 벼슬을 잃고 낙향했다. 이후 정계 복귀를 했지만 번번이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육유를 유명하게 만든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당완(唐琬)과 혼인을 하였는데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구박과 강요로 이혼을 하게 되고 왕씨 여성과 재혼을 하게 된다. 당완도 재가하여 조사정(趙士程)이라는 사람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이 10년 뒤 우연히 만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심원(沈園)의 벽에 시(詩)로써 화답했으며 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당완은 죽고 말았다. 그때 심원의 담벼락에 남긴 시(詩)가 유명한 채두봉(釵頭鳳)이다. 이후에도 육유는 당완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회환을 많은 시로 남겼다.

 

65세 때에 향리에 은퇴하여 농촌에 묻혀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32세부터 85세까지의 약 50년간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상(詩史上)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당시풍(唐詩風)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국토회복의 절규를 담은 비통한 우국의 시를 짓는가 하면, 가난하면서도 평화스러운 전원생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적한 시를 짓는 등, 매우 폭넓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검남시고(劍南詩稿)(85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