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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주돈이 애련설(周敦頤 愛蓮說)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중국 북송시대 대표적 유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이다.

특히 연(蓮)을 사랑하여 그가 남긴 애련설은 명 문장으로 지금까지 많이 애송되고 있다.

한가한 틈을 내어 수련(水蓮) 사진과 함께 애련설(愛蓮說)을 소해(小楷)로 자서(自書)해 보았다.

애련설(愛蓮說 :연꽃을 사랑하노라)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물과 땅에 사는 초목의 꽃 중에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다.

 

​晉陶淵明獨愛菊(진도연명독애국)

진나라 때 도연명은 유난히 국화를 좋아하였고,

 

自李唐來, 世人盛愛牧丹(자이당래, 세인성애목단)

이씨가 세운 당조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무척이나 사랑하였으며,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여독애련지출어니이불염)

나는 오로지 진흙에서 나고도 때 묻지 않는 연꽃을 매우 사랑하노라

 

濯淸漣而不妖(탁청련이불요)

맑은 물로 씻어냈으면서도 요염하지 않고

 

中通外直, 不蔓不枝(중통외직, 불만부지)

몸통은 뚫려있고 겉모습은 반듯하며, 덩굴이나 가지도 뻗지 않고,

 

香遠益淸, 亭亭淨植(향원익청, 정정정식)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아지고, 반듯하고 깨끗하게 서있어서

 

可遠觀而不可褻玩焉(가원관이불가설완언)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차마 다가갈 수 없도다.

 

予謂: 菊, 花之隱逸者也(여위: 국, 화지은일자야)

나는 말 하기를 . 국화는 꽃 중에 은둔한 현자요

 

牧丹, 花之富貴者也(목단, 하지부귀자야)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요

 

蓮, 花之君子者也(연, 화지군자자야)

연꽃은 꽃 중에 군자로다.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희! 국지애, 도후선유)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 도잠(도연명) 이후 들려오는 바 드물고

 

蓮之愛, 同予者何人(연지애, 동여자하인)

나와 같이 연꽃을 사랑할 이 누구인가?

 

牧丹之愛, 宜乎衆矣(목단지애, 의호중의)

모란을 사랑하는 이 마땅히 많으리로다!

 

수련(水蓮)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 또는 주염계(周濂溪)는 북송의 관리이자 유학자이자 문학가로,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염계(濂溪), 시호는 원(元)이며, 중국 후난성(湖南省) 융저우시(永州市) 다오현(道縣) 출신이다.

본래 이름은 돈실(敦實)이었으나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초명인 종실(宗實)과 같은 글자를 피하기 위해 돈이(敦頤)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자(周子)라고도 부르는데,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를 가리키는 주자(朱子)와 혼동되므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는다. 죽은 뒤에 신종(神宗, 1067~1085)에게 ‘원(元)’이라는 시호를 받아 ‘원공(元公)’으로 불리기도 한다. 염계(濂溪)라는 호는 1072년 장시성(江西省)의 루산(廬山) 개울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 개울을 염계라 하고 스스로를 염계선생(濂溪先生)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아버지는 현(縣)의 지사(知事)를 지낸 보성(輔成)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8살 때인 1025년 모친과 함께 후난성 헝양(衡陽)에 사는 외삼촌 정향(鄭向)에게 가서 살았다. 1031년에는 모친과 함께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037년 외삼촌이 양절전운사(兩浙轉運使)로 임명되자 다시 모친과 함께 윤주(潤州)의 단도현(丹徒縣, 지금의 장쑤성 전장시)으로 옮겨 살았다. 그 뒤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士)로 있던 정향의 추천을 받아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를 거쳐 푸젠성(福建省) 난안(南安)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난안(南安)에 있을 때 대리사승(大理寺丞) 정향(程珦)의 두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 뒤 합주판관(合州判官), 건주통판(虔州通判) 등을 거쳐 신종이 즉위한 뒤에는 광동전운판관(廣東轉運判官)으로 발탁되었다. 만년에는 지남강군(知南康軍)으로 임명되어 장시성의 싱쯔현(星子縣)에 머무르다가 루산의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집을 짓고 은거했다. 모친의 무덤도 루산으로 옮겨왔는데, 1073년 병으로 죽은 뒤 모친의 무덤 곁에 묻혔다.

 

주돈이는 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도가(道家)와 불교의 주요 인식과 개념들을 받아들여 우주의 원리와 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새로운 유학 이론을 개척했고, 그의 사상은 정호·정이 형제와 주희 등을 거치며 이른바 정주학파(程朱學派)라고 불리는 중국 유학의 중심적 흐름을 형성했다. 때문에 그는 한(漢) 나라 때의 훈고학(訓詁學)을 거치며 끊어졌던 성(性)과 도(道)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되살려 유학을 새롭게 부흥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저술은 7권의 주자전서(周子全書)로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태극도설에서는 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태극도(太極圖)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하나이며, 태극이 음양(陰陽)으로 나뉘고, 여기에서 다시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오행(五行)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인간의 선(善)·악(惡)과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을 설명하려 했다. 《태극도설》에는 무(無)에서 유(有)가 비롯된다는 도가와 불교 사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태극도설》은 이기(理氣) 철학의 기본형식을 제시해 성리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희가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를 지어 자신의 주된 이론적 근거로 삼는 등 《태극도설》의 해석은 후대의 유학 논쟁들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역통(易通)》, 《주자통서(周子通書)》라고도 하는 《통서》는 도덕론을 중심으로 《태극도설》의 중심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주돈이는 여기에서 ‘성(誠)’을 인간의 모든 덕(德)과 행위의 근본이 되어야 할 근본 규범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寂然不動)인 성(誠)을 순수지선(純粹至善)으로 보고, 그것을 완전하게 체득하면 5상(五常)의 덕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주정(主靜)과 무욕(無慾)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주희는 《통서》에 대해서도 주석을 붙여 《통서해(通書解)》를 남겼으며, 이는 성리학의 도덕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연꽃에 빗대어 군자의 덕을 이야기한 이 산문은 중국의 한문학(漢文學)을 대표하는 글 가운데 하나로 후대에 널리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