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시제(詩題) 정초(庭草)는 말 그대로 뜰에 수없이 돋아난 풀이다. 지금은 풀마다 각자 이름이 있지만 과거에는 뜰에 핀 꽃을 위해 제거해야 할 이름 없는 잡초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옛 선인들은 자세히 쳐다보며 풀마다 작은 꽃이 피고 향기를 품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모진 생명력으로 늘 곁에서 쉽게 볼 수 있었기에 더욱 애잔한 마음으로 한시를 많이 남겼으리라. 내가 가꾸는 텃밭에도 대표적 잡초인 별털꽃아재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싸움에서 결국 두 손 들지만 한여름에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데 국화과 식물답게 자세히 살펴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를 항복시킨 승자의 면모를 바라보며 제거보다 공존의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즉 "잡초와 더불어 함께하는 주말농장"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게으른 농부가 내벹는 이유 있는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소개하고자 하는 정초 관련 한시 3수는 간취자 이수익, 백담 구봉령,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남긴 시(庭草)로 정원에 핀 꽃들과 함께 돋아난 작은 풀에서 느낀 감흥을 한시로 표현하였는데 세분이 남긴 시정을 함께 느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간취자 이수익(看翠子 李受益) :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자는 붕지(朋之)이고 호는 간취자(看翠子)이다.
庭草本非種(정초본비종) 뜰의 풀은 본래 심어 놓은 것이 아니오
春風自發生(춘풍자발생) 봄바람이 저절로 돋은 것이라네
惟有色香別(유유색향별) 오로지 색깔과 향기만이 서로 다를 뿐
無數亦無名(무수역무명) 헤아릴 수 없고 이름도 없다네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柏潭). 명종 15년(1560)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당시 동서 당쟁에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다. 저서에 백담집(栢潭集)이 있다.
庭心細草綠滋茸(정심세초록자용) 뜰 가운데 잔풀은 푸르게 우거졌는데
一任春天雨露濛(일임춘천우로몽) 봄날의 자욱한 비이슬에 젖도록 내맡기네
苦語兒曹休踐躪(고어아조휴천린) 아이들에게 밟지 말라고 야단도 치지만
化工生意自無窮(화공생의자무궁) 생명을 키우는 조물주의 뜻은 무궁하기만 하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 :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 금석학자 · 고증학자이며 실학자인 추사 선생에 대하여는 앞서 "추사 김정희 시 몇 수"에서 소개한 바 있어 생략토록 하겠다.
一一屐痕昨見經(일일극흔작견경) 하나하나 나막신 발자국 어제 지나간 자국인데
蒙茸旋復被階庭(몽용선복피계정) 무성한 풀들이 다시 자라나 섬돌 위 뜰을 덮었네
機鋒最有春風巧(기봉최유춘풍교) 기봉에는 봄바람 가장 교묘하게 불어와서
纔抹紅過又點靑(재말홍과우점청) 붉은색 발라 놓고 지나가자 또 푸른색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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