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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정암 민우수 춘일(貞菴 閔愚洙 春日)

 주변의 나지막한 산들이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봄의 절정에 이른 시간이다. 올해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거의 동시에 개화했다. 예년 같으면 시차를 두고 피어 바라보는 즐거움과 기다리는 기대감이 컸었는데 졸지에 춘사(春事)가 지나가 버렸다. 조석으로 20도를 넘는 기온 차로 인해 생체리듬을 잃어버린 벌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급격하게 변하는 자연환경의 변화는 인간이 만든 불행이자 파멸로 가는 경고일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정암선생의 시 춘일의 시를 통해 그 또한 화사한 봄날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춘곤이 찾아오면 책 베고 누워 봄의 정취를 만끽했으리라.

 

춘일(春日 : 봄날)

春深庭院日如年(춘심정원일여년) 봄이 깊어 가는 정원 하루 해는 길어만 가고

萬樹風花落檻前(만수풍화락함전) 난간 앞 지는 꽃잎 바람결에 흩날리네.

方識太平眞有象(방식태평진유상) 태평성대 좋은 것을 이제야 알겠으니

相公終夕枕書眠(상공종석침서면) 이내몸 종일토록 책을 베고 누웠노라.

 

정암 민우수(貞菴 閔愚洙 1694 ~ 1756)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菴) · 섬촌(蟾村),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관직은 171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초년에 김창집 · 김창협에게 나아가 수업하였고, 1716년에는 호서지방의 산수를 유람하고, 권상하에게 나아가 경전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하면서 학문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1721년 중부(仲父) 민진원과 매부 김광택이 유배되는 등 일가에 화가 미쳐 여강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6년 봉릉참봉 및 세자세마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명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물러나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 · 세자찬선 · 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서풍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양송체(兩宋體 :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체)와 밀접하다. 작품은 비문과 간찰 등으로 전하며, 비문은 해서로, 간찰은 행서와 초서를 주로 썼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비문으로는 1741년 <권상유신도비(權尙遊神道碑)>가 전하며, 양송체의 영향이 농후한 비문으로는 1744년의 순창 <삼인대비(三印臺碑)>, 1745년의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故壘碑)>, 1747년 정읍의 <고암서원묘정비(考巖書院廟庭碑)>가 있다. 이들 서체는 석봉체의 골격에 안진경체의 웅건장중미나 비후미가 가미된 서풍이다.

 

또한 1750년대 이후의 비문은 이전의 웅건함에 원필세로 부드러움을 더했던 서풍과 다르게 순봉세에 연단連(斷)이 없어 사뭇 장중하며 날카로우며 명확한 획법과 정밀한 짜임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비문은 1746년 <충민공이봉상묘비(忠愍公李鳳祥墓碑)>나 1750년 <송심묘갈(宋諶墓碣)>, 1750년 <송대립묘갈(宋大立墓碣)>, 1752년 <순창군수조해묘갈(淳昌郡守趙楷墓碣)>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장령윤우정묘갈(掌令尹遇丁墓碣)>, <생원박이홍묘갈(生員朴以洪墓碣)> 등이 전한다.

 

간찰에 쓰인 행서와 초서는 조부와 친부의 영향 아래 조선 중 · 후기 간찰의 서풍을 보여준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근묵(槿墨)》 게재의 <행서간찰>은 필치가 활달하면서도 균형감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고종사촌에게 보낸 <초서간찰>은 내용 가운데 '밤에 서둘러 쓴다'라고 했듯이 필치가 가늘고 빠르다. 저서로는 1799년 활자본으로 간행된 16권의 『정암집(貞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