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덕천서원. 남명 조식 시 2수 욕천, 서인병(德川書院. 南冥 曺植 詩 2首 浴川, 書釼柄)

내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 산청이다. 지난 주말 동생과 함께 고향을 찾아 산재되어 조상묘 6기에 대한 이장절차(移葬節次)를 간소하게 마치고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찾았다.

 

덕천서원(德川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소재한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등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講學)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남명 선생은 1501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1572년 산청군 시천면에서 생을 마쳤다. 평소 남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지라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서원은 아담하고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대비되는 면모를 갖추고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의 거두로 1501년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1572년 산청군 시천면에서 생을 마쳤다.

통영대전 고속도로 - 산청IC - 59번 국도(새로 개통된 지리산 터널)이용 - 덕천서원
서원 입구 시정문(時靜門)
서원앞 은행나무(一樹二種) 품안에 둥지를 틀은 벚꽃나무가 만개했다.
소박하게 자리잡은 서원(敬義堂)
덕천서원의 중심건물이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 현판에는 건물에 대한 상량문과 중수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우측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진덕재(進德齋)
좌측 유생들의 공간인 수업재(修業齋)
경의당 뒷편 남명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

남명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그의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방울의 이름이 '성성자(惺惺子)'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스스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지니도록 경계하기 위해 옷깃에 달고 다녔다. 그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남명은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남명은 지니고 있는 칼에 ‘내명자경(內明者敬 :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요) 외단자의(外斷者義 :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의()’이다)이라 새겼다.  그래서 남명의 칼을 경의검(敬義劍)이라 했다

덕천강 입구 세심정((洗心亭) 옆에 자리한 시비(詩碑)는 1549년에 제자들과 거창의 감악산을 유람할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씻으며 이 시 욕천(浴川)과 외조카 이준민의 사위인 조원이 급제했을 때 그의 칼자루에 써준 시 서인병(書釼柄) 2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선생의 고항지사(高抗之士 : 고상하고 뻣뻣한 선비)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시 2수를 자서해 보았다.

 

욕천(浴川 : 냇물에 몸을 씻다)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사십 년 동안 쌓인 찌꺼기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거센 물결 맑은 물에 씻어 버리리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그래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는 시천천(矢川川)의 세심정(洗心亭), 좌측에 욕천 시비(詩碑)가 있다.

 

서인병(書釼柄 : 칼자루에 씀)

离宮抽太白(리궁추태백) 불 속에서 허연 칼날 뽑아내니

霜拍廣寒流(상박광한루) 서리 같은 그 칼 빛 광한전까지 닿아 흐르네.

牛斗恢恢地(우두회회지) 견우성 북두성이 뜬 넓디넓은 곳에서

神游刃不游(신유인부유)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기록된 조식선생에 대한 평판은 남명의 단성소(丹城疏 : 단성현감사직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이 논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유일(遺逸: 재야에 은거하면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참봉에 임명되고 또 주부(主簿 : 아문의 문서와 부적을 주관하던 종육품 벼슬)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極力) 논하였다.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 풍속과 교화가 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