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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임연 이양연 시 오주구거(臨淵 李亮淵 詩 梧州舊居)

우리나라도 고령화로 접어들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전국적으로 150만 채를 넘어 10채 중 1채 가까이가 빈집인 샘이다. 팔 수 있는 늘어나는 빈집도 도심에 터전을 잡고 있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 추억을 간직하기 위하여 쉽게 내놓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전체 주택의 15% 넘게 빈집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으로 급속하게 늘어나는 빈집은 농촌지역이 급속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말해주며, 전후(戰後) 베이비부머가 마지막으로 농촌을 지탱해주는 세대가 될 것이다.

나 또한 1년에 한두 번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게 되는데 이와 같은 심정으로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 역시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오주(梧州 : 현재 서울 송파구 근처로 추정)를 찾아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주구거(梧州舊居)를 읊었으리라. 소싯적 감흥이 절로 일어나는 시구로 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전아간고(典雅簡古)의 흥취(興趣)가 물씬 풍겨오는 명시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오주구거(梧州舊居 : 오주의 옛 집터)

古墟禾黍中(고허화서중) 기장 밭에 묻혀버린 옛날의 집터

堆石煤猶黑(퇴석매유흑) 쌓인 돌엔 그을음 아직도 검은데

昔日日斜時(석일일사시) 그 옛날 하루해가 저물 때에는

阿孃窓下織(아양창하직) 어머님은 창 밑에서 길쌈을 했네

 

임연 이양연(臨淵 李亮淵 1771 ~ 185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진숙(晋叔), 호는 임연(臨淵).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상운(李商雲)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1830년(순조 30)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선공감(繕工監 : 공조에 딸려 토목과 영선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제수되고, 1834년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838년 충청도사(忠淸都事)에 임명되었으며, 1842년에 공조참의, 1850년(철종 1) 동지중추부사로 승진, 1851년 호조참판(戶曹參判)·동지돈녕부사 겸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만년에 후학 교육에 힘썼으며, 심경(心經 : 송나라 때 眞德秀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心性修養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과 근사록(近思錄 : 송나라 때 신유학의 생활 및 학문지침서)으로 스승을 삼아 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는 물론 역대 전장문물(典章文物 :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와 문화의 산물. 곧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법률 따위의 문화에 관한 모든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성력술수(星曆術數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리 위하여 음양(陰陽), 복서(卜筮) 따위로 길흉을 점치는 방법)·전제군정(田制軍政 : 조선후기 조세의 형태로 민간에서 거두어 들였던 항목 중에서 전결세(田結稅)를 거두는 업무와 군사(軍事)에 관한 군행정(軍行政)과 군재정(軍財政)관련 업무의 총칭)에 널리 통하였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침두서(枕頭書)·석담작해(石潭酌海)·가례비요(嘉禮備要)·상제집홀(喪祭輯笏) 및 시문집으로 임연당집(臨淵堂集)이 있다. 문장이 전아간고(典雅簡古 : 문장이 우아하고 간결하면서도 예스러움)하여 후학들이 다투어 암송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