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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고운 최치원 시 황산강 임경대(孤雲 崔致遠 詩 黃山江 臨鏡臺)

글 쓰는 사람이라면 지필묵(紙筆墨)에 대한 욕심이 있다. 나 또한 다름없이 여유 있을 때마다 꾸준히 구입해 모은 붓이 300여 자루에 이르고 있다. 이름난 장인이 만든 붓은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는 것도 있고 운 좋게 중가로 구입한 붓이 마음에 들어 추가로 구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한지(화선지)는 연습지를 주로 사용하는데 작품지는 워낙 고가다 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며, 연습지는 주로 종이먼지가 덜 날리고 스며드는 발묵이 비교적 적당한 송지(松紙)를 구입하여 사용한다.

며칠 전 중국 붓을 인터넷을 통해 10여 자루를 구매하여 사용해 봤는데 붓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모필이 힘이 없고, 붓 털이 빠지기 일쑤며, 운필의 묘미를 느끼기에 크게 부족함이 있어 후회와 함께 버리려고 했으나 먹의 농담을 조절하고 몇 번 사용하다 보니 나름 손에 익어 고운선생의 시 한수를 행서체로 써 보았다. 고운 선생의 시는 앞서 추야우중(秋夜雨中)과 고운 최치원 시 2수를 소개한 바 있다.

 

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 857년 ~ 미상)은 신라의 대표적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경주최씨의 시조(始祖)이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며,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국보47호)에 나타난 그의 글씨 또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수려하고 격조높은 운필을 구사했음을 알수있다.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시무 10조(時務十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어지러운 현실을 비관하며 유랑하다가 가야산의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유학자였지만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선종과 교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승려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말년에는 해인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문장과 문학에도 능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변려문(騈儷文 : 중국 고대의 한문체로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로 이루어져 수사적으로 미감을 주는 문체) 형식의 그의 문장은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형식미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륙집(四六集) 등이 있다. 그가 지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시호(諡號 )는 고려 현종(顯宗) 14년(1023년)에 추증(追贈)한 문창후(文昌侯)이다.

 

황산강 임경대(黃山江 臨鏡臺)

煙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안개 낀 봉우리 우뚝우뚝 낙동강은 넘실넘실

鏡裏人家對碧峰(경리인가대벽봉) 거울 속 인가가 푸른 봉우리 마주했네

何處孤帆飽風去(하처고범포풍거) 외로운 배 바람 가득 안고 어디로 가는가

瞥然飛鳥杳無蹤(별연비조묘무종) 날던 새 홀연히 자취 없이 아득히 사라지네

 

위 시는 고운집(孤雲集) 권 1과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 권 19에 황산강 임경대(黃山江 臨鏡臺)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임경대(臨鏡臺)는 황산강(黃山江: 낙동강의 옛 이름) 가에 있으며, 최치원이 노닐면서 임경대 제영(臨鏡臺題詠)을 지었다고 하여 최공대(崔公臺)라고도 불린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산 72번지에 있다.

최치원은 임경대의 원경(遠景)을 바라보다가 시선(視線)을 외로운 돛배와 아득히 멀어지는 새로 옮김으로써 외로운 심정을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