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선생이 남긴 둔세시(遁世詩 : 속세을 떠나 은둔하기 위하여 지은 시) 시구 중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蹤跡)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 훗날 내 자취를 살펴려 한다면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는 입산의 심경으로 들어간 가야산에서 해인사 고승(高僧)들과 교우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소개하고자 하는 증금천사주인(贈金川寺主人)은 미상(未詳)인 금천사 주지의 삶을 노래한 시로 번뇌가 없는 승방(僧房)의 한 길(一路)의 삶이 상대적으로 시비이욕(是非利慾)의 천 길(千岐)의 세속 삶보다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은 청구풍아(靑丘風雅 :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명현들의 시선집)에서 주지 스님이 30년간 이 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마음속에 다른 갈림길이 없기 때문에 30년이나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이다.(心無他岐(심무타기) 所以能住三十年之久(소이능주삼십년지구)."라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고운선생 또한 소지(笑指)의 한가한 삶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고운 최치원 시 증산승, 제가야산독서당. 2수(孤雲 崔致遠 詩 贈山僧, 題伽倻山讀書堂. 二首) (tistory.com)
증금천사주인(贈金川寺主人 : 금천사 주지에게..)
白雲溪畔剏仁祠(백운계반창인사) 흰 구름 낀 시냇가에 절을 짓고
三十年來此住持(삼십년래차주지) 삼십 년간 이곳에서 주지로 지내네
笑指門前一條路(소지문전일조로) 웃으며 문 앞의 한 줄 길을 가리키니
纔離山下有千岐(재리산하유천기) 산 아래를 벗어나자마자 천 갈래 길이 있네
앞에서 소개한 고운 선생은 당(唐)에서 귀국 후 6두품 출신으로서는 원대한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당시 어지러운 세태와 진골 귀족들의 견제 · 비방으로 낙심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상심하고 다시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결국 40세 되는 해인 896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갔다. 관직을 버린 이후의 삶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 그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치원은 방랑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산림 아래의 강과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면서 서적을 베개로 삼아 자연을 읊는 시를 지었다. 경주(慶州)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産), 합천(陜川) 청량사(淸涼寺),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등이 최치원이 유람하던 지역이다. 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숨어 살면서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정현(定玄) 법사와 함께 도우(道友) 관계를 맺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라는 내용이 있다.
최근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쌍계(雙磎)계곡 일대에서 고운 선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금석문 17점이 무더기로 발견되는 등 통일신라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의 묘가 이 지역에 있다는 방증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며 활발한 고증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1차 조사 결과 최치원의 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견이지만 기록상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당시 뛰어난 고승들과 교우하며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사망 당시 도우(道友)와 가족들에 의하여 장례가 치러졌을 것이며, 가야산 해인사 부근에 찾지 못한 그의 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도 경주최씨의 시조묘(始祖墓)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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