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용(李藏用 1201 ~ 1272) 고려 후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초명은 이인기(李仁祺)이며, 자는 현보(顯甫)이다.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6대손이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경(李儆)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서경사록(西京司錄)·교서랑 겸 직사관(校書郎兼直史館)·국자대사성 추밀원승지(國子大司成樞密院承旨)를 거쳐 1256년(고종 43)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58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1260년(원종 1) 참지정사 수태위 감수국사 판호부사(參知政事守太尉監修國史判戶部事), 1262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어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太傅判兵部事太子太傅)를 겸하였다.
1264년에 왕이 몽골에 입조할 때 수행, 해동현인(海東賢人)으로 칭송받아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다. 귀국 후 왕을 잘 수행한 공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고 경원군개국백(慶源郡開國伯)에 봉해졌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더하여졌다.
1267년 몽골이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보내어 일본을 초유(招諭 : 불러서 타이름)하려는 데 반대, 이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감수국사가 되어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 김구(金坵)·허공(許珙) 등과 함께 신종·희종·강종에 이르는 3대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문하시중에 오르고 1269년 절일사(節日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71년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려 할 때 손위(遜位 : 임금 자리를 내놓음)할 것을 권한 일로 면직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경사(經史)에 밝고 음양(陰陽)·의약(醫藥)·율력(律曆)에 통달했으며, 문장에 능하고 불서(佛書)도 깊이 연구하였다. 몽골과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일찍이 개경 천도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승휴(李承休)를 천거해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시호는 문진(文眞)이다.
이장용 선생의 시 자관(自寬)은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한탄해 본들 어찌할 도리가 없고 그저 웃고 넘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다만 내가 살아온 길이 올바르고 자아를 찾고자 하는 나만의 도가 어떤지를 알고자 할 뿐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살아왔음을 자인하면서 해질 무렵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당당한 자신에 대한 위로의 뜻이 담겨있다. 과연 나의 삶은 어떠 한가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자관(自寬 : 스스로 위로하다)
萬事唯宜一笑休(만사유의일소휴) 세상만사 그저 한 번 웃고 말아야지
蒼蒼在上豈容求(창창재상기용구) 더 푸른 하늘인들 어찌 구하려는 대로 들어주리오.
但知吾道何如耳(단지오도하여이) 다만 내 도가 어떠 한가를 알고자 할 뿐
不用斜陽獨倚樓(불용사양독의루) 석양을 바라보며 홀로 누각에 기댈 것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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