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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행촌 이암 시 기식영암선로(杏村 李嵒 詩 寄息影菴禪老)

이암(李嵒 1297 ~ 1364년)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명신이자 서화가이며, 자는 고운(古雲), 호 행촌(杏村),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이군해(李君侅)이다.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이존비(李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이우(鐵原君 李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했으며, 충선왕이 이암의 재주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祕省校勘)에 임명된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해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었다.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그러나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않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하여, 이로 인해 밀성(密城: 밀양)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왕저(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으며,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교체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南行)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忠定王)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당대의 명필인 이암의 기식영암선로(寄息影菴禪老)는 식영암 노스님에게 준 시로 비록 정승의 높은 관직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명성에 지나지 않고, 한가롭고 여유 있는 삶은 조그만 암자에서 불도를 닦으며 참선하는 식영암 스님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 담겨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암이 남긴 필사본과 함께 격조 높은 시 한수를 자서해 보았다.

 

기식영암선로(寄息影菴禪老 : *식영암 노스님에게 주다)

浮世虛名是政丞(부세허명시정승) 뜬세상 헛된 명성이 바로 정승이요

小窓閑味卽山僧(소창한미즉산승) 작은 창의 한가한 맛은 곧 산속 절의 스님일세

箇中亦有風流處(개중역유풍류처) 그중에서 또 풍류로운 곳 있으니

一朶梅花照佛燈(일타매화조불등) 매화 한 가지 부처 앞 등불에 비치는 것이리

 

*식영암(息影菴, 생졸연대 미상) : 고려의 중으로 가전체 설화(假傳體 說話)인 정시자전(丁侍者傳 : 지팡이를 의인화한 설화)을 지었음.

 

이암의 필사본 화엄경 십회향품(十廻向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