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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이언적 임거십오영(李彦迪 林居十五詠) 15수(首) 중 13~15수

오늘은 24 절기 중 세 번째 절기(節氣)인 경칩(驚蟄)이다. 경칩은 계칩(啓蟄)이라고도 하며, 이 날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로 겨울철의 대륙성 고기압이 약화되고 이동성 고기압과 기압골이 주기적으로 통과하게 되어 한난(寒暖)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기온은 날마다 상승하며 마침내 봄으로 향하게 된다. 한서(漢書)에는 열 계(啓) 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 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기록되었는데, 후에 한(漢) 무제(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휘(避諱 : 문장에 선왕의 이름자나 중국의 연호자, 성인이나 선조들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는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언어관습)하여 놀랠 경(驚) 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하였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고 하였듯이, 우수와 경칩은 새싹이 돋는 것을 기념하고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절기이다.

 

예로부터 별호(別號), 당호(堂號), 호(號) 또는 아호(雅號)는 피휘의 관습 때문에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긴 유교 문화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나 연소를 막론하고 본 휘(諱)이나 자(字) 외에 별명처럼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중국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 후 한국에서도 많이 사용하였다.

고대엔 호가 일반적이지 않았고 아주 높은 학문적 명망이 있거나 높은 학식을 지녔다고 자칭하는 자만이 호를 가졌다.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 ~ 1976) 선생은 인천 출생으로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와 문인화(文人畵), 전각(篆刻)에 두루 능했는데, 1968년 뇌출혈에 의한 오른쪽 마비의 반신불구로 한때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가 이를 극복, 왼손으로 서예를 계속하여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현대서예를 이끈 주역이다.

그의 호 ‘검여(劍如)’는 ‘칼과 같다’는 뜻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검(劍)처럼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고 싶어 검여(劍如), 석여(石如), 표여(瓢如)의 삼여(三如)라 하려 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검여(劍如)라 했다”고 한다.

근대 서성(書聖)으로 추앙받았던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 선생은 유희강을 회고하며 한국 서계(書界)에 추사(秋史) 이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서가(書家)로 인정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初心)을 잊지 않겠다고 하는 여초(如初), 칼처럼 날카롭게의 검여(劍如)는 자경정진(自警精進)의 요소와 좌우명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지금도 호 또는 아호를 이름과 함께 서예인들이 늘리 사용하는 것이리라.

 

연이어 이언적(李彦迪)의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 15수 중 13~15수를 살펴보고자 한다.

 

13. 관심(觀心 : 마음을 보다)

空山中夜整冠襟(공산중야정관금) 빈 산속에 한 밤중에 의관을 가지런히 하니

一點靑燈一片心(일점청등일편심) 한 점 푸른 등불 일편단심 이어라.

本體已從明處驗(본체이종멸체험) 본체는 이미 제멋대로 밝은 곳을 증험하였기에

眞源更向靜中尋(진원갱향정중심) 참된 근원을 고요함 속에 찾아서 다시 바라보네.

 

14. 존양(存養 : 성품을 기름)

山雨蕭蕭夢自醒(산우소소몽자성) 산속에 비가 시끄럽게 떨어져 꿈에서 절로 깨니

忽聞窓外野鷄聲(홀문창외야계성) 창 밖의 들 꿩 소리 홀연히 들리는구나.

人間萬慮都消盡(인간만려도소진) 세상사 만 가지 생각이 모두 다 사라지니

只有靈源一點明(지유령원일점명) 한갓 영혼의 근원이 있어 한 점 명료하게 드러나네.

 

15. 추규(秋葵 : 가을 해바라기)

開到淸秋不改英(개도청추불개영) 맑은 가을이 되어 피고 꽃부리를 바꾸지 않으니

肯隨蹊逕鬪春榮(긍수혜경투춘영) 좁고 좁은 길을 따라서 피면서 봄 꽃과 다투고.

山庭寂寞無人賞(산정적막무인상) 적막한 산속 집에는 감상하는 사람 없어도

只把丹心向日傾(지파단심향일경) 다만 일편단심 견지하며 해를 향해 기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