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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이규보 영망(李奎報 詠忘), 이달충 제흥교승통전행시축(李達衷 題興敎僧統餞行詩軸)

우리는 복잡 다양한 생활 속에서 항상 바쁘게 살아간다.

옛사람들의 글을 접하다 보면 태평성대(太平聖代)나 전란(戰亂) 속에서도 욕망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감을 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생활방식은 변했어도 마음에서 오는 번뇌의 깊은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도인(道人)들은 망기(忘機 : 속세의 일이나 욕심을 잊음)를 하고자 좌망(坐忘 : 조용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들어감)을 참구(參究 :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하며 그 경지에 도달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오래 전 국문학의 거장이신 모산 심재완(慕山 沈載完 1918~2011)선생께서 쓰신 서예작품 아망오(我忘吾 : 내가 나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림)의 글귀가 떠오른다. 당시 연소(年少)하여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한시를 두루 접하면서 지금에 이르러 오상아(吾喪我 : 내가 나를 죽임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함)의 깊은 뜻을 알고자 한발자국이라도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주변에 모든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온 세상에서 자신마저도 모든 기억에서 잊어버리고자 했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의 시 한 수와 제정 이달충(霽亭 李達衷)의 시를 함께 살펴보며 나를 잊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느껴보고자 한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에 대하여는 앞서 소개하였기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영망(詠忘 : 잊어버림을 읊다)   – 이규보(李奎報)

世人皆忘我(세인개망아) 세상 사람 모두 나를 잊었으니

四海一身孤(사해일신고) 온 세상의 이 한 몸은 외롭구나.

豈唯世忘我(기유세망아) 어찌 오직 세상만 나를 잊을까

兄弟亦忘予(형제역망여) 형과 아우도 또한 나를 잊었네.

今日婦忘我(금일부망아) 오늘은 아내가 나를 잊게 되고

明日吾忘吾(명일오망오) 내일에는 내가 나를 잊을 테지.

却後天地內(각후천지내) 도리어 뒤에는 온 천지 안에서

了無親與疏(요무친여소) 친한 이 생소한 이 전혀 없겠네.

 

제흥교승통전행시축(題興敎僧統餞行詩軸 : 흥교(스님) *승통을 전송하며 두루마리에 시를 적다.)  - 이달충(李達衷)

但要無心耳(단요무심이) 다만 무심의 경지를 요할 뿐

何傷有髮乎(하상유발호) 내 머리 기른 것이 무슨 상관인가?

莫言儒斥佛(막언유척불) 유교가 불교를 배척한다고 말하지 말게

嘗謂我忘吾(상위아망오) 내가 스스로 나를 잊고자 한다네.

擾擾慕羶蟻(요요모전의) 부산하게 누린 것을 찾는 개미들이요

區區吞餌魚(구구탄이어) 구구하게 미끼를 무는 물고기들이네.

幻生多怪事(환생다괴사) 환생한다면 이처럼 해괴한 일 많으니

轟醉乃良圖(굉취내량도) 크게 취하여 흥을 즐기려 함 이라네.

 

*승통(僧統) : 고려 시대에, 교종의 법계(法階) 가운데 하나. 교종의 법계에서 가장 높은 등급으로, 왕사의 아래, 수좌의 위이다.

 

제정 이달충(霽亭 李達衷, 1309 ∼ 1385)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달중(李達中), 자는 중권(仲權), 호는 제정(霽亭)이다.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이 그의 당숙이다. 18세인 1326년(충숙왕 13) 신천(辛蕆)이 주관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도 급제했다.

전리판서(典理判書), 감찰어사(監察御史), 호부 상서(戶部尙書),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등을 역임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동북면 병마사로 안변(安邊)에 갔을 때 이성계(李成桂)를 만났는데, 이성계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자손들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학문을 인정받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발탁되었다. 신돈(辛旽)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파직되고, 신돈이 죽은 뒤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동문선(東文選)』에 상당한 분량의 시문이 선발되었다. 고려 시대에 문집이 간행되었지만 일찍 유실되었다. 후손들이 여러 문헌에 전하는 시문 약간을 수습해 제정집(霽亭集)으로 엮었다.

 

(주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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