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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여암 신경준 관수화층(旅庵 申景濬 冠峀花層), 관악산 가을단풍

매일 새벽 동트기 전에 오르는 영종도(永宗島) 백운산(白雲山) 정상에서 맞이하는 일출의 모습이 장관이다. 내려오는 길가에 노랗게 핀 산국(山菊)이 향기를 품어내며 산객(山客)을 반기고 떨어진 낙엽은 하루가 다르게 산길을 덮고 있다.
입동(立冬)인 오늘아침에는 제법 한기를 느낄 정도의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단풍이 물든 원산(遠山)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요즈음 지난 주말 관악산에 올랐다.
관악산(冠岳山)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이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 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 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관악산 산봉우리 모양이 불과 같아 화산(火山)이 된다고 해서 이 산이 바라보이는 한양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화기(火氣)를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기운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獬豸)를 만들어 관악산을 바라보게 했다.
풍수학적인 측면에 대하여는 앞서 소개한 바 있다.
 
평소 즐겨 찾았던 관악산은 언제나 나를 반겨주고 있기에 오를 때마다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대사의 선시 산거(山居 : 산에 살며)를 되뇌곤 한다.
山非招我住(산비초아주) 산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我亦不知山(아역불지산) 나 역시 산을 알지 못하네
山我相忘處(산아상망처) 산과 내가 서로 잃어버린 그곳
方爲別有閑(방위별유한) 비로소 유달리 한가함이 있네
 
번잡하고 각박한 서울생활에서 한가함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근교에 명산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쉽게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풍이 예전처럼 곱게 물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즐겨 찾는 험난코스로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기에 멋진 관악산의 풍광을 사진과 함께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1712 ~ 1781)의 관수화층(冠峀花層) 시를 살펴보고자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이 70세 되던 해 어느 봄날 한강 북쪽에 위치한 첨학정(瞻鶴亭)에 앉아 관악산을 바라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은 벌겋게 불이 난 듯했다. 철쭉 사이로 근데 군데 파란 빛깔은 운치를 더하고 화사한 봄이 지난 후 가을이 되면 단풍은 더 붉게 물들어 나를 반길 것이기에 사시사철 나를 반겨주는 관악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했다.
 
관수화층(冠峀花層 : 관악산 꽃 무더기)

躑躅花爭發(척촉화쟁발) 앞다퉈 핀 철쭉꽃 사이로
朝曦又照之(조희우조지) 아침 햇살 비춘다.
滿山紅一色(만산홍일색) 온 산이 붉은색으로 채웠는데
靑處也還奇(청처야환기) 푸른 곳이 오히려 멋지다.
得意山花姸(득의산화연) 산 꽃은 어여쁘게 뽐내며
簇簇繞峨嵯(족족요아차) 한 무더기 또 한 무더기 꼭대기까지 에둘렀네.
莫愁春已暮(막수춘이모) 봄이 저물까 걱정일랑 아예 말게나
霜葉紅更多(상엽홍갱다) 단풍 들면 다시 붉은색으로 갈아입겠지.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1712 ~ 1781)은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지리학자로서,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전북 순창에서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 신말주(申末舟)의 11대손으로 진사 내(淶)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이의홍(李儀鴻)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전적(典籍)·정언(正言)·장령(掌令)·사간(司諫) 등을 역임했다. 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써 대부분의 저술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특히 1750년(영조 26년)에 지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는 훈민정음을 한자어 음운으로 도표를 만들어 소개한 책으로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큰 업적을 남겼다. 1770년(영조 46년)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 팔도지도(八道地圖),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그 후 여러 곳의 지방관을 지내다가 1779년(정조 3년) 고향 순창에 돌아가 살았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관직과 성률(聲律)·의복(醫卜)·법률·기서(奇書)에까지 통달했으며, 실학사상에 근거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했다.
저서로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는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운도(韻圖)를 작성해서 한자로 음운(音韻)을 나타낸 책으로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 소옹(邵雍)이 지은 "황극경세성음창화도(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본보기로 하여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을 설명한 것이다.
1938년에는 당시의 조선어학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한 일이 있는데 현재 필사본 한 권으로 남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거제책(車制策), 병선책(兵船策), 수차도설(水車圖說),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수위(山水緯) 등이 있다.
 

(관악산 가을풍경)

홍촌마애승상(洪村磨崖僧像 :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5구의 미소짓는 스님이 새겨진 모습)
즐겨찾는 관악산6봉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6봉능선
관악산 정상모습
가는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문원폭포
흔적만 남아있는 옛암자터
잠시 쉬어가는 장소인 소나무아래 평상바위
멀리서 바라본 장군봉
저 멀리 보이는 삼성산 능선
관음바위(좌측바위가 관음상을 닮았다)
좌측에서 바라본 관음바위
관음바위 뒷모습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바위
풍화의 흔적
깊게 패인 능선길
풍화와 수마가 만들어낸 경이로운 걸작품
장군봉
산부추
바위틈새 자연이 만든 소나무 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