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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아산 외암민속마을

10월 1일 국군의 날이 휴일로 지정됨에 다라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외암마을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도 흥얼거리는 ‘고향의 봄’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은 언제 불러도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노래다. 이 노래는 한국 아동 문학의 거장 동원 이원수(冬原 李元壽. 1911~1981) 선생이 작사했다. 이 노래의 배경지는 경남 창원(昌原)이다. 그가 어린 시절 봄이 오면 창원읍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질달래 명소인 천주산(天柱山)과 남산에 복숭아꽃 살구꽃이 지천인 꽃동네가 이곳이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경남 산청이다. 봄이오면 산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만개하였고 50여 가구 중 기와집 몇 채뿐이고 나머지는 초가집이 대부분 이였다. 그래서인지 초가집만 보면 마음이 설레고 고향생각이 절로 난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 한 곳이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초가을의 정취와 함께 옛모습 그대로 간진한 외암마을을 살펴보며 추억의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외암마을은 2000년도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된 이 마을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한 민속 마을로 주산(主山)인 설화산(雪華山. 441m)기슭 경사지 남서향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전에 강씨(姜氏)와 목씨(睦氏)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 : 조선 시대, 종9품(從九品)의 문관 품계. 종사랑(從仕郞)의 아래이다. )을 지낸 이정(李挺. 1297∼1361)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禮安 李氏)가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정의 6대손인 이간(李柬. 1677 ~ 1727)이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현재의 外巖은 일제강점기 때 쓰기 편한 한자로 개칭)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 부분 원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 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한 마을에 전통적인 수법의 상류·중류·서민가옥이 함께 남아있어 마을의 형성이나 전통가옥의 연구에 매우 가치가 있다. 또 설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정원은 매우 특색 있고 운치 있어 마을 전체가 귀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처가(妻家)이기도 한 이 마을은 역사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단풍이 곱게 드는 10월 말, 꽃들이 만발한 4월 초에 옛 고향 찾는 마음으로 방문을 권하고 싶다.

 

(외암민속마을 풍경)

 

찾아가는 길
외암마을 입구
고정실(古鼎室) 편액은 추사(老阮) 김정희의 글씨이다. 옛 가풍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아호로 사용하였다.
고정실 편액 뒤 청등백석산방(靑藤白石山房)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서화가인 미불(米芾. 1051~1107)의 글씨를 집자했다.
마을 중심부에 위치한 건재장(健齋莊)은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머문 곳으로 편액글씨는 우당(愚堂?)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