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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윤증 명재고택(尹拯 明齋故宅), 시 한 수

조선 중 후기 충청을 대표하는 명족 가문으로 송시열은 연산(連山)의 김씨, 노성(魯城)의 윤씨, 회덕(懷德)의 송씨로 거론했다고 전한다. 사계 김장생(1548 ~ 1631), 신독재 김집(1574 ~ 1656)으로 대표되는 연산의 광산김씨(光山金氏), 우암 송시열(1607 ~ 1689), 동춘당 송준길(1606 ~ 1672)을 대표하는 은진송씨(恩津宋氏)는 회덕(懷德)을 근거지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으며, 이에 윤증(1629 ~ 1714)은 파평윤씨(坡尹氏, 일명 노성윤씨)를 대표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 : 솥의 발처럼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의 삼각축을 이루고있다.

지난겨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한 명재고택을 다녀왔다. 비록 날씨는 차가웠지만 명재 윤증 선생의 고택을 찾아 선생께서 남긴 자취를 상세하게 알고자 그가 남긴 시 한 수를 자서해 보았다. 아울러 항아리로 유명한 고택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素月中天色(소월중천색) 하얀 달은 하늘 가운데 떠 있고

寒溪徹曉聲(한계철효성) 차가운 시냇물은 새벽 내내 졸졸대네

虛心看夜氣(허심간야기) 마음을 비우고 밤기운을 보며

黙坐聽雞鳴(묵좌청계명) 묵묵히 앉아 닭 울음소리 듣노라

 

윤증(尹拯 1629~1714) 조선 후기 학자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老論 )과 소론(少論 )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領袖)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寓居 :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삶)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윤증은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近思錄  :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 주희 와 여조겸이 공동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을 편찬한 일을 모방하여 거상(居喪)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 : 임금이 특별히 내리던 지시나 분부)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을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윤증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송시열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윤선거가 죽은 후 1673년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윤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윤증은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증은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윤증을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辨誣 : 시시비비를 가려 억울함을 밝히는 것)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 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윤증이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兪棨)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윤증과 윤증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다.

1722년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직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명재고택(明齋故宅)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하는 파평 윤씨의 한 종가이다.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09년에 완공하여 1725년, 명재의 손자가 입주한 것으로 전한다. 명재고택은 "ㄷ"자 모양의 안채와 일자형의 중문간채가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 후면, 높은 곳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중기의 가장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명재고택은 윤증 선생의 사회적, 학문적 지위를 생각할 때 결코 큰 규모는 아니나, 전통한옥의 전형적인 디자인과 아이디어들을 잘 보여준다. 특히, 명재고택은 인간적 척도(human scale)를 잘 구현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한옥이다.  명재고택에는 대대로 종부들이 거주하며 주택을 잘 관리하고 있다. 그분들의 노력으로 명재고택은 아름다운 한옥의 모습을 오늘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명재고택은 중요 민속자료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재고택 전경( 1709년에 지어진 고택은 윤증선생이 이집에서 살지 않고 10리 밖 유봉에서 작은 초가집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고 해서 고택(古宅 : 오래된 집)이 아닌 고택(故宅 : 연고가 있는 집)으로 불린다.)
장독대를 가득 채운 정감 넘치는 항아리(종부로 부터 대를 이어 씨간장으로 현재까지 그 맛이 독채로 전해진다 하여 전독간장으로 불린다고 한다)
고택과 세월을 함께 한 인상적인 느티나무
사랑채 마루 '이은시사(離隱時舍)' 현판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는 집' 이라는 뜻
"ㄷ"자 형의 안채모습 현판은 윤두식 선생이 쓴 작품 '귀은허청(歸隱虛淸)'은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청정하게 지낸다'는 뜻
고택 옆에 자리한 노성향교(魯城鄕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