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윤증(尹拯)의 명재고택(明齋故宅)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충청을 대표하는 명족(名族)으로 연산(連山)의 광산김씨(光山金氏), 노성(魯城)의 파평윤씨(坡平尹氏), 회덕(懷德)의 은진송씨(恩津宋氏)를 언급한 바 있는데 우암은 자신을 명족으로 말하기보다 가까운 인척인 송담 송남수(松潭 宋柟壽)를 염두에 두고 지칭했을 수 있다. 그 당시 송담은 90세, 우암은 82세를 살았으니 천명(天命)를 누렸던 장수 집안이다.
우암이 소싯적 쌍청당(雙淸堂)에 놀러 다니며 마치 신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송담을 대하면서 그의 학문과 발자취를 담고자 했을 것이며, 자부심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은진송씨(恩津宋氏)를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보다 70년 앞서 태어나 고매(高邁)한 인품과 후덕(厚德)한 성품으로 사람들로부터 존망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던 송담 선생의 면모를 느껴볼 수 있는 시 산재사시(山齋四時)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산재사시(山齋四時 : 산 집의 4계절)
春(봄)
衆峰環擁一川奔(중봉환옹일천분) 뭇 봉우리 둘레를 막아 냇물 하나 달리고
山杏花邊晝掩門(산행화엄주엄문) 산 살구 꽃핀 두메 한낮에도 문을 닫았네.
碧靄滿林春寂寂(벽애만림춘적적] 숲에 가득 푸른빛 가득하여 봄은 적적한데
子䂓來叫月黃昏(자규래규월황혼) 두견이 돌아와 부르짖어 노란 달빛 날이 저무네.
夏(여름)
萬松陰裏一茅茨(만성음리일모자) 매우 많은 소나무 그늘 속 띳집 하나
活畫池㙜淑景遅(활화지대숙경지) 그림 같은 연못 돈대에 맑은 빛이 기다리네.
午枕初醒猿鶴夢(오침초성원학몽) 낮잠에서 비로소 깨니 원숭이와 학의 꿈이라
綠槐高處囀黃鸝(녹괴고처전황리) 푸른 느티나무 높은 곳에 노란 꾀꼬리 지저귀네.
秋(가을)
南陌稻香不怕飢(남맥도향불파기) 남쪽 두렁의 벼 향기 아마 흉년 들지는 않겠고
松蕈紫蠏滿筐肥(송심자해만광비) 송이버섯과 참게가 광주리 가득하여 넉넉하네.
每逢韻釋談山水(매봉운석담산수) 늘 고상한 스님 만나 산과 물을 이야기하고
不向人間說是非(불향인간설시비) 세상을 향해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네.
冬(겨울)
避世雲林深復深(피세운림심복심) 세상을 피해 구름 숲 깊고 깊은 곳에 머무니
雪邊茅屋斷來尋(설변모옥단래심) 눈 내린 두메의 초가집 찾아오는 이도 끊어졌네.
日携經卷山窓下(일휴경권산창하) 매일 경서와 책을 들고 산집 창문 아래에서
餘外紛紛不掛心(여외분분불괘심) 여가 밖의 번거로움이 마음에 끌리지 아니하네.
송담 송남수(松潭 宋楠壽. 1537 ~ 1626)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로(靈老), 호는 송담(松潭). 군자감정(軍資監正) 송요년(宋遙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여림(宋汝霖)이고, 아버지는 안악군수(安岳郡守) 송세훈(宋世勛)이며, 어머니는 진사 정난연(鄭鸞年)의 딸이다.
1578년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된 뒤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사헌부감찰·정산현감·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상의원판관·평시서영(平市署令)·호조정랑(戶曹正郞)·통천군수·임천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지방관 재직 시에는 치적으로 읍민이 송덕비를 세워 주기도 하였다. 1601년 임천군수로 재직 중 임진왜란 때 주장(主將)을 구하지 않은 수령으로 탄핵받아 치죄(治罪)당하였으나 곧 사면되었다.
이후 벼슬에 뜻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선조인 송유(宋愉)의 제실(祭室) 쌍청당(雙淸堂)을 중수(重修)하여 송(松)·국(菊)·매(梅)·죽(竹)을 심어 소영(嘯咏 : 시나 가사 등을 읊음)하고, 옛 선인의 언행을 초록(抄錄)하여 검신요결(檢身要訣)을 저술하였다.
그는 성품은 맑은 지조가 있어서 평생 말도 빨리 하지 않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사물(事物)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수행(修行)만을 좋아하였으므로, 향당(鄕黨)에서는 그의 효도와 우애를 칭찬하고, 친구들은 그의 청렴과 소박(疏薄)을 좋아하였다. 함께 교유(交遊)한 사람들이 모두 한 시대의 이름난 명사들이었는데, 그의 문집에는 이름난 인사들이 그를 위해서 지은 글들이 본인의 글보다 훨씬 많다.
젊었을 때 벼슬살이를 하다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훌쩍 홀로 찾아갔으며, 모든 사물에 감촉(感觸)되거나 좋은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시를 읊었다. 그 풍류(風流)가 아주 대단하여, 명절이나 좋은 계절에는 술을 마련하고 벗을 불러서 한껏 즐겼는데, 그 말과 즐거움을 모두 시(詩)로 표현하였다. 일생 동안 일찍이 남들이 싫어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소리가 한 번도 없었다. 그와 먼 친척 사이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어렸을 적에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언제나 쌍청당(雙淸堂 : 송유(宋愉)가 낙향하여 대전시 중리동에 지은 별장으로 난계 박연(蘭溪 朴堧)이 쌍청당으로 명명하였다)에 가서 뛰어놀았는데, 늙은 노인이 언제나 뜰을 깨끗하게 쓸고 오롯하게 앉았던 담담한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송시열은 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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