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들판이나 언덕을 바라보면 짙은 향기와 함께 노랗게 핀 산국(山菊)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국화차의 원료이기도 한 산국, 감국(甘菊)은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데 잎의 모양이나 꽃의 크기가 조금 차이가 있어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일전에 국화를 소개할 때 “이 꽃이 지고 나면 다시 꽃 볼일 없다”라는 당나라 문학가인 원진(元稹)의 국화 시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로부터 마지막 피는 국화를 바라보며 한 해가 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진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상하걸(霜下傑), 즉 서리 속에서도 절개를 잃지 않는 호걸이라 칭송했으며, 또한 국화차 외에 국화 꽃잎을 말려 베갯속에 넣고 잠을 자면 아침에 머리가 맑아진다고 하였다. 긴 긴 겨울밤 국화주를 마시며 오상고절(傲霜孤節)의 풍취을 느껴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으리라.
국화(菊花)
秋叢繞舍似陶家(추총요사사도가) 가을 국화 집을 둘러싸 도가(도연명)의 집 같은데
遍繞籬邊日漸斜(편요리변일점사) 울타리 따라 감상하니 어느덧 해가 저무네
不是花中偏愛菊(부시화중편애국) 꽃 중에서 국화를 편애하는 게 아니라
此花開盡更無花(차화개진갱무화) 이 꽃이 다 지고 나면 다른 꽃 볼일 없기 때문이라네
원진(元稹 779 ~ 831)은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로 자는 미지(微之)이며, 허난성(河南省) 사람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였으며, 일찍이 관직에 나가 15세의 나이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직간(直諫)을 잘하여 환관(宦官)과 수구적인 관료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구세력과 타협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의 벼슬을 지냈다. 한때 군신과의 갈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831년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로 재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하였다. 백거이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시가 일찍 알려져 원재자(元才子) 또는 원·백(元白)으로 불렸으나, 문학적 재능이 백거이를 능가하지 못한 데다가 정치상의 변절 때문에 원진의 명성은 그리 높지 못했다. 백거이와 문학관을 같이 하여 두보(杜甫)를 추존(追尊)하면서 사실을 따라 제목을 달았으며 현실에 존재한 사실을 솔직하게 전달하여 이 시대의 정당성과 광명성(光明性)을 남겨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시를 고풍(古諷), 악풍(樂諷), 고체(古體), 신제악부(新題樂府 : 원진이 지은 악부시), 율시(律詩), 염시(艶詩 : 주로 남녀의 애정을 표현한 연애시로 여성의 미덕·미모 및 규방을 대상으로 지은 시) 등 6가지로 나누고, 백거이(白居易)가 신제악부에 치중한 반면 원진은 고제악부(古題樂府)에 치중하였다. 지금까지 719수의 시가 전해지며 내용별로 보면 풍유시가 가장 많다. 그중에서 60년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농가(農家)의 한을 쓴 전가사(田家詞), 상인들의 불로소득을 풍자한 고객악(估客樂)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장편 서사시 연창궁사(連昌宮詞)는 궁인들의 대화 형식을 이용하여 당나라 현종(玄宗)의 사치하고 황음무도(荒淫無道)함을 폭로하면서 조정의 계획으로 노력해야지 병력을 동원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우의(寓意 :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가 뚜렷하고 구성이 잘 이루어져 있으며 묘사가 세밀하고도 치밀하며 풍격이 새로워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와 우열을 다툰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저서에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60권)이 있고, 소설집으로 앵앵전(鶯鶯傳)이 있다.
주변에 핀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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