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차한잔의 여유

진묵대사 게송(震默大師 偈頌)

단순하고 모르게 사는 삶이 복잡하고 더 많이 안다는 것보다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모를 일이다. 앞서 소개한 “사찰주련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절학무위한도인(絕學無為閑道人 : 절학무위(絶學無爲)란? 무위법(無爲法)의 가르침을 바로 실천하는 것을 절학(絶學)이라고 하는 것이어서 무위의 한도인은 불법의 가르침을 모두 초월해 차별, 분별하지 않고 진여(眞如)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이었는데 복잡하고 어려운 불교적 해석을 떠나 그냥 단순하게 글도 모르고 하는 일 없는 한가하고 단조로운 도인의 삶이 어쩌면 최고 행복한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추사 김정희의 만년작시(晩年作詩)는 함경도 북청 유배시절 백발노인 부부가 옥수수밭 일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읊은 시를 살펴보면 

 

독유일주옥수록(禿柳一株屋數綠) 한그루 오랜 버들 두어 칸 초가집에

옹파백발양소연(翁婆白髮兩蕭然) 백발 노부부는 둘 다 호젓하고 쓸쓸한데

미과삼척계변로(未過三尺溪邊路) 석자 좁은 시냇가 길 넘어보지 못하고서

옥촉서풍칠십년(玉薥西風七十年) 옥수수 서풍 맞으며 칠십 년을 살았다네... 

 

위 시에서도 절학무위한도인의 모습으로 평생 조그마한 냇가를 건너간 일 없이 단조롭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노부부의 삶속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았으리라.

 

대장부로 태어나 구도자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이고, 참 사람의 진정한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진묵대사(震默大師)의 게송(偈頌)이다. 진묵대사는 명리를 초탈하여 삶을 한바탕 연극무대의 놀이처럼 아낌없이 즐기며 아무것에도 속박을 받지 않은 대자유인이 남긴 게송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묵대사 게송(震默大師 偈頌)  其一.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달을 등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 삼아

大醉遽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 홀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되노라

 

其二.

奇汝靈山十六愚(기여영산십육우) 저 영산의 열여섯 어리석은 자여

樂村齋飯幾時休(요촌재반기시휴) 마을의 잿밥을 즐김 언제 그칠 것인가?

神通妙用雖難及(신통묘용수난급) 신통과 묘용은 비록 따르기 어려우나

大道應問老比丘(대도응문노비구) 대도는 응당 이 늙은 비구에게 물을지어다.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는 조선 중기 승려로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의 나옹(懶翁)선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후신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진묵대사는 1568년(선조 1)에 봉서사(鳳棲寺)에서 출가하였다. 이름은 일옥(一玉)이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의 성이나 집안의 내력조차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사미승(沙彌僧)일 때 신중단(神衆壇)의 향을 피우는 직책을 맡았는데 그날 밤 주지의 꿈에 부처가 향을 피우니 제천(諸天 : 천상계의 모든 天神)은 받을 수 없노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진묵의 신이(神異) 로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 일정한 주처(住處) 없이 천하를 유람하였다.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菴), 전주의 원등사(遠燈寺), 대원사(大元寺) 등에 있었다. 신통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적(異蹟)을 많이 행하였다고 전한다.

경전 중 능엄경(楞嚴經)을 즐겨 읽었고,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빠져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늘 만취하였으므로 스스로 비승비속(非僧非俗)임을 자처하였다. 그가 남긴 술에 관한 게송(偈頌)외 한 수와 제문이 전부였으며,  유학(儒學)에도 매우 박식하였다.

그는 이승의 인연이 다한 어느 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시자에게 물었다.

"이것이 석가불(釋迦佛)의 그림자니라." 하니

시자가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자 그는 "너는 고작 내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의 참 그림자는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가 홀연히 입적해 버렸다. 그는 그렇게 72세의 일생을 마쳤다.

여래(如來)의 화신(化身)으로서 선(禪)과 교(敎)를 아울러 수행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저술은 없으나 조선 후기의 승려 의순(意恂)이 구전되어오던 것을 정리하여 진묵대사에 대한 유일한 자료인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라는 책을 남겼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사(鳳棲寺)에 부도(浮屠)가 있다.

 

진묵대사가 어머니의 49재를 마치고 올린 제문(祭文)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태중시월지은 하이보야)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슬하삼년지양 미능망의) 슬하에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나이다.

萬歲上 更加萬歲 子之心 猶爲嫌焉(만세상 갱가만세 자지심 유위혐언)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해도 자식의 마음은 부족하 온데

百年內 未萬百年 母之壽 何其短也(백년내 미만백년 모지수 하기단야) 백 년 생애에 백 년도 채우지 못하였으니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은지요

單瓢路上 行乞一僧 旣云已矣(단표로상 행걸일승 기운이의) 홀로 표주박으로 길에서 걸식하는 이 중이야 이미 말할 것도 없겠지만

橫釵閨中 未婚小妹 寧不哀哉(횡채규중 미혼소매 령불애재) 비녀 꽂고 아직 혼인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上壇了 下壇罷 僧尋各房(상단료 하단파 승심각방) 윗단의 불공 마치고 아랫단의 재를 마치니 중들은 각자 방으로 찾아가네

前山疊 後山重 魂歸何處(전산첩 후산중 혼귀하처) 앞 뒤  첩첩산중에 혼령은 어디로 가시었는지요?

嗚呼哀哉(오호애재) 아 슬프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