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에 주석(住席)한 지 보름이 지났다. 장마철이라 흐린 날씨에도 새벽에 백운산(白雲山)을 올랐는데 산 이름답게 연무(煙霧)가 정상을 감싸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시계가 확보되어 멀리 호룡곡산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호룡곡산(虎龍谷山) 해발고도 245m이며 무의도(舞衣島)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호랑이와 용이 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호룡곡산은 약 20여 년 경 연육교(連陸橋)가 가설되기 전 올라보았는데 산행 중 길 가에 보았던 무덤이 눈에 들어와 한동안 머문 기억이 있다. 무덤을 보는 순간 남서향의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 :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으로 바둑판 위치가 혈(穴)이 된다.)의 형국으로 사람이 앉을만한 안정적인 자연석 대 여섯 개 가운데 위치하여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무덤 주변으로 드문드문 들국화가 피어있는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비록 웅장한 산세의 기운을 받기에는 부족했지만 소박한 풍수적 요소를 두루 갖춘 명당임이 틀림없었기에 여기에 묘터를 정한 후손들의 발복(發福)이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앞서 몇 번의 풍수(風水)와 관련 내용들을 언급한 바 있는데 우리나라 풍수는 금낭경(錦囊經)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낭경은 조선시대 음양과(陰陽科)의 필수 과시지리서(科試地理書) 가운데 하나였고, 또 다른 풍수 초기 문헌인 청오경(靑烏經)과 함께 배강(背講) 혹은 배송(背誦)으로 시험을 치를 만큼 중요시된 책이기도 했다.
금낭경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의 초기 고전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장서(葬書) 혹은 장경(葬經)으로 불린다. 전체 2000여 자에 불과한 문장이면서도 풍수지리학의 장소 선정에 필요한 형기론(形氣論), 정확한 방향과 방위 설정에 필요한 이기론(理氣論), 음택(陰宅)이나 양택(陽宅) 조성 시 시일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선택론(選擇論) 등 풍수지리학의 여러 분야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어 풍수지리학자들의 필독서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경(經)이 ‘금낭경’으로 불리게 된 사연은 당(唐) 나라 황제 현종(玄宗)이 화청궁(華淸宮)에 들러 심운루(尋雲樓)를 바라보며 승려 홍사(泓師)에게 산천의 형세를 묻자, 홍사는 매사를 *곽박(郭璞)의 장서(葬書)를 들어 설명했다. 이에 황제가 책을 바치라고 명령을 내리자, 홍사는 천하의 비법인 이 책이 세상에 알려져 신기(神技)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현종은 “비단주머니(錦囊)로 싸서 어좌(御座) 뒤의 휘장(揮帳)에 감추어둔다면 내신(內臣)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로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서(秘書)인 ‘금낭경’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함께 살펴볼 한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응물(韋應物)의 임락양승청고(任洛陽丞請告 : 맡겨진 낙양승(洛陽副市長)의 사직을 청하며) 5언절구 한시로 그가 낙양승(洛陽丞) 벼슬을 사직하며 지은 시로 앞서 소개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귀전원거(歸田園居)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이를 행서체로 자서해 보았다.
임락양승청고(任洛陽丞請告 : 맡겨진 낙양승(洛陽副市長)의 사직을 청하며)
方鑿不受圓(방착불수원) 사각구멍은 둥근 것을 수용할 수 없고
直木不爲輪(직목불위륜) 곧은 나무는 둥근 수레바퀴가 될 수 없다.
揆才各有用(규재각유용) 재능을 잘 관리하면 각각 쓰임이 있게 되고
反性生苦辛(반성생고신) 본성을 거슬리면 삶이 괴롭고 힘들게 된다.
折腰非吾事(절요비오사) 남에게 허리를 꺾음은 내가 따를 일이 아니며
飮水非吾貧(음수비오빈) 물 마시시고 사는 가난도 가난으로 여기지 않는다.
休告臥空館(휴고와공관) 사직서를 올려놓고 빈 공관에 누워 있으니
養病絶囂塵(양병절효진) 병 요양도 되고 시끄러운 세상소리 끊어지는구나.
遊魚自成族(유어자성족) 연못에 노는 고기는 절로 떼를 짓고
野鳥亦有群(야조역유군) 들판의 새도 또한 무리가 있었구나.
家園杜陵下(가원두릉하) 고향 땅이 *두릉 아래에 있음을 생각하면
千歲心氛氳(천세심분온) 천년 동안 내 마음이 기운차고 든든하다.
天晴嵩山高(천청숭산고) 날이 개이니 *숭산이 높아 보이고
雪後河洛春(설후하락춘) 눈이 녹으니 낙수 강가에 봄이 왔도다.
喬木猶未芳(교목유미방) 키가 큰 나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어도
百草日已新(백초일이신) 온갖 풀들 날마다 이미 새로워지는구나.
著書復何爲(저서복하위) 책은 지어서 다시 무엇하겠는가?
當去東皐耘(당거동고운) 마땅히 동쪽 언덕으로 가서 김이나 매리라.
*두릉(杜陵 : 서한(西漢)나라 류쉰(劉迅)의 황제(皇帝)와 왕후(王王)가 산시(陝西) 성 시안시(西安市) 동쪽에 묻혀있는 릉)
*숭산(嵩山 : 중국, 하남성 북부, 등봉의 북방 15km에 있는 산으로 오악(五嶽)의 하나이다.)
곽박(郭璞 276~324)은 초당(初唐) 사람으로 자는 경순(景純)이며, 중국 산서성(山西省) 운성시(運城市) 하동(河東) 사람으로 서진(西晉) 시기 건평(建平) 태수였던 곽원(郭瑗)의 아들이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서진의 혜제(惠帝(재위 290~306)), 회제(懷帝(재위 307~313)) 때 선성태수(宣城太守) 은호참군(殷祜參軍)을 역임했다. 동진(東晉) 시기에는 남교(南郊)의 부(賦)를 지어 원제(元帝(재위 317~322))의 찬사를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됐고, 형옥(刑獄)의 번거로움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려 상서랑(尙書朗)이 됐다. 후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왕돈(王敦)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322년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서(占筮)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그에게 길흉을 물었다. 당시 그는 점괘가 흉(凶)하다는 이유를 들며 반란을 멈추라고 말했다가 왕돈으로부터 살해당하고 말았다. 진(晉) 나라 명제(明帝)는 현무호(玄武湖) 주변에 곽박의 의관총(衣冠塚)을 세워주었고, 후에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추존하였다.
곽박은 시인이자 학자이면서도 술법가(術法家)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던 인물이다. 진서(晉書) 곽박전(郭璞傳)은 곽박이 곽공(郭公)으로부터 청낭중서(靑囊中書)를 받아 천문(天文)과 오행(五行), 복서(卜筮)에 능통하게 됐고, 묘지의 길흉을 점치는 점묘(占墓)에도 능해 진나라 때 매우 유명했음을 전한다.
또한 시부(詩賦)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노장(老莊)의 철학이 반영된 유선시(遊仙詩) 14수와 강부(江賦)를 남겼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왕은(王隱)과 함께 진사(晉史)를 편찬했다. 이아주(爾雅注), 방언주(方言注), 산해경주(山海經注), 수경주(水經注), 초사주(楚辭注)등 많은 작품에 주석을 달았다. 문집으로 곽홍농집((郭弘農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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